한때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읽을 만한 한국 소설가로 장강명을 첫 번째로 권했던 때가 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권하지 않는다. 우선 요즘은 나에게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인지’ 의견을 묻는 사람이 없다. 또한, 장강명을 탐독했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인식 체계의 격절이 있다. 유신 시절의 김지하와 지금의 김지하 사이만큼의 격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장강명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리뷰를 쓰지 않아 독서 이후의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릴 만한 단서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을 테니까 계속 찾아서 읽었겠거니’ 하는 생각이다.

 

   그의 등단작인 『표백』은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한국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던 때다. 현실로부터 무작정 도망가는 데에는 이야기만한 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한동안 ‘장강명’이라는 이름으로 인상적인 작품이 발표된 적은 없었다. 내가 당시 『표백』에 대해 가진 인상이라면 ‘한겨레문학상’이라서 가능했던, 적당히 잘 만들어진, 적당히 사회적인 소설이라는 것뿐. 뭐, 앞으로 작품 활동이야 계속 하시겠지요, 건필을 바랍니다. 이 정도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장강명’이라는 이름을 잊고 지내다, 『한국이 싫어서』를 접했다. ‘헬조선’ 담론이 한창이던 때였다. 약간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지금-여기’의 당대성을 이렇게 잘 포착해낸 소설이 있었던가. 거기다 불필요한 수식, 미학 그 자체를 위한 미학적 문장도 없어 잘 읽힌다. 드디어 ‘한국문학은 재미도 없고 만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는 세간의 해묵은 편견을 반박할 증거를 찾았다! 이 소설 이후로 나는 ‘장강명 전도사’를 자처한 것이다. 한국문학이 재미가 없어요? 고개를 들어 장강명을 보세요. (한국문학하고 담 쌓은, 그리고 정말로 ‘한국이 싫어서’ 이민 준비하고 있던 나의 지인에게도 이 소설을 추천했다. 그 소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결혼해서 잘 사는 듯 보인다.)

 

 

 

       

   전도사는 자고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하는 법. 장강명의 신작은 신작 알리미 신청해서 소식 받자마자 주문해서 읽고(『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 이전 소설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호모도미난스』, 『열광금지, 에바로드』). 단편도 찾아 읽었다. 계간 문학잡지 『세계의 문학』(민음사 간, 지금은 폐간되고 없다)에 게재된 「알바생 자르기」,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단편 하나 더(파업 참여자/관계자의 삶을 건조하게 취재하듯 쓴 단편소설이었다), 『다행히 졸업』에 수록된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까지.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 읽지 않은 장강명의 작품은 『한밤의 산행』 수록 단편, 『뤼미에르 피플』, 이 둘 뿐이다. 물론 다른 지면에 내가 확인하지 못한 작품이 실렸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전도사는 어쩌다 냉담자가 되었을까?

 

 

 

  장강명을 탐독할 때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더 테라스’를 유튜브로 찾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는 여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내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하기 이전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2016년이 되고, 그의 본모습(?)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악스트를 위한 변명’(링크)이었다. 은행나무에서 출간하는 문학잡지 악스트는 매 호마다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익명의 SF 소설가 ‘듀나’와의 인터뷰가 그 준비의 무성의함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알트SF’라는 1인 SF 웹진이 악스트의 인터뷰를 비판했고, 은행나무 출판사는 여기에 법적 어쩌구 하는 문제를 언급해 결국 알트SF는 무기한 휴간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 장강명의 저 글이 드러난 것이다.

  초록창에 ‘악스트를 위한 변명’ 검색하면 나오는 블로그 글(링크)에서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 SF 독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글을 쓴다는 것을, 은행나무 출판사나 악스트 측으로부터 어떠한 부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객관적으로 양측(악스트-은행나무/알트SF)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기술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은행나무-악스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는 이 글을 ‘물타기의 전형’이라 판단했다.

 

 

 

 장강명의 첫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출간 전 인터넷 연재분만 읽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읽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가령 폴리아모리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링크).

 

 

 

 

  올해 들어서는 한국일보에 칼럼도 종종 쓰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를 보고 나는 문자 그대로 기함했다. 그 제목부터가 대단하다. ‘심오롭고 공허한’(링크). 지금의 내 기준에서 보면 첨삭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가장 심각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심오로운’, 그러니까 심오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는 문장이 SNS에서 널리 확산되며, 그 중 일부는 ‘위험하거나 해로운’ 것이라 규정했다. 그 대표적 예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같은 문장이라고 한다. 이 ‘심오로운’ 문장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면서 살 것이라며 농을 들었는데, 그 아래 문단에서 ‘장학생 선발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 형사재판에서 범죄자 양형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라는 요지의 문장들을 발견하다 보면, 그가 ‘차별’과 ‘구분’을 제대로 ‘구별’하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때마침 이 글을 내가 읽은 시점은 군인의 신분으로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A대위에게 군사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이러한, 인간 이하의 일이 너무 태연하게 일어나는 것을 차마 예측하지 못하고 무려 2주 전에 이런 글을 썼으니까 이번 일과 상관이 없을까? 나는 오히려 그와 같은 부류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레드홍이나 태극기부대, 일베처럼 차별을 대놓고 조장하는 이들은 그래도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이 올라가면 걸러내기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 수련을 다년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자연히 소설에 드러났고, 기사문과 같은 명확하고 건조한 문장은 그가 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여기에 독자들이 많이 호응해 주었다. 그런 그가 소설 아닌 글을 쓴다. 사실과 판단, 개념과 오개념을 섞어서 쓰고, 논점을 교묘하게 흐린다. 나는 그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읽고 대놓고 책잡을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파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쓰는 것이다. 장강명의 산문에 나타나는 이런 ‘심오로운’ 문장들에, 의외로 많은 이들이 납득을 한다. 그리고 진정한 ‘숙의’는 이 지점에서 멈춘다. ‘숙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말들을 논의의 차단이라고 받아들이시면, 아, 예. 할 말이 없어집니다. 전 ‘논객’이었던, 곧 ‘페미니즘의 억지를 고찰’하는 책을 낸다는 모 씨가 생각나는군요.

 

  이쯤 되니, 장강명이 ‘진보가 좋아하는 주제들 적당히 믹스하면서’ 글을 썼을 뿐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와 닿기도 한다(링크).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작가들은 왜 작품을 이렇게 못 쓰는가? 예전에 이우성이 장강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인터뷰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링크).

  이런 점에서 장강명은 나에게 애증이다. 내가 여전히 과문한 탓이겠지만, ‘지금-여기’의 현실을, 선명한 서사와 함께 환기하며,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끔 하는 소설을 쓰는 동시대 작가는 한국 문단의 규모에 비하면 초라하리만큼 적다(진보연하면서 막상 자기 성찰도 안 하는 분들이 일단 한 다스다). 장강명이 그 초라하리만큼 적은, 몇 안 되는 동시대 작가에 해당한다. 소설만 보면 그렇다. 그 가치를 높이 산 증거로, 작년에 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 장강명의 단편을 읽히고 토론을 진행했다. 물론 ‘성인의 현실’이 학생들에게 곧이곧대로 와 닿겠냐마는, 그래도 한국전쟁기나 산업화 시대 소설보다는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불행히도 교과서에는 그런 ‘옛날’ 소설들이 많다). 소설만 보면, 장강명의 몇몇 소설은 학교 현장에서 주로 가르쳐지는 대부분의 ‘아재 문학’보다 낫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이전보다 덜 읽는 지금도 장강명의 신작은 뭐가 나왔나 찾아보게 된다(사실은 신간 알리미를 해제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자 한 이유도 장강명의 최근작 『아스타틴』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다.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1도 없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운데, 초지능의 후계자들이 초지능의 자리를 놓고 서로 살육전을 펼친다.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어, 잠깐, 나 이런 이야기 본 적 있어.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백(?)한다. “이 소설은 SF 명작들의 영향을 듬뿍 받았고, 저는 글을 쓰며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 SF 세계관 속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은 스티븐 킹의 『런닝 맨』, 타카미 코슌의 『배틀 로얄』,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에 멋지게 나온 바 있습니다. 특히 『런닝 맨』과 『헝거 게임』은 그런 서바이벌 게임들이 TV로 방영되고, 시청자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SF 장르가 특히 한국 문학계에서는 변방 취급을 받고 끊임없이 주류로부터 ‘후려치기’를 당하는 만큼,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만 이 작품을 ‘굳이’ 봐야 하는 이유를, SF 문외한인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작품에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이야기 말미에 주인공 ‘사마륨’의 행보와 관련한 내용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2017년 상반기 현재가 정말 잘 연상된다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작년에 『5년 만에 신혼여행』 100자평에 이렇게 썼었다: “장강명의 문장을 변용하자면, 나는 소설가 장강명의 팬이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장강명에 대해서는 견해를 다소 달리 한다.” 지금은 여기에 한 문단을 덧붙인다.

  장강명은 최근 칼럼(링크)에서 세대갈등을 다루며 베이비붐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잘 모르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추측해 써” 본다고 했다. 88만원 세대에게 모를 것이라고 추측한 이야기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 개인주의와 인권 감수성은 언어와 같다. 몇 시간 동안 공부한다고 저절로 몸에 익지 않는다. 그리고 성, 인종,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 건 선진국에서도 상당히 최근 일이다.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지금 외국어를 배우느라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서툴고, 아는 것도 자꾸 틀린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언어 습득에 있어 학습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직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권 의식이 언어와 같다면, 인권에 대한 직관이 없는 사람은 인권을 배우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이해를 해도 잘못 이해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일부가 뛰어난 직관을 가질 수도 있고, 88만원 세대의 일부가 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충분히 숙의하고 있다. 그는 글에서 쉽게 제3자, 관찰자, 판단자의 위치를 점한다. 창작자의 사상이 교묘하게 뒤틀리면 그 흔적은 반드시 그 자신의 작품에 남는다. 나는 그가 오래도록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그에게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ps. 『아스타틴』 본문에 편집 오류인 듯 보이는 부분이 있어 문의를 하려고 출판사 트위터를 찾아 봤는데, 음... 총체적 난국이다.

  ps2. 악스트 사태의 이후 결과: 악스트 편집위원들이 듀나에게 공식 사과하고, 문제의 인터뷰는 악스트 인터뷰 모음집 『이것이 나의 도끼다』에서 전면 삭제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