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십수 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 2017년 3월 10일을 중요하게 언급할 것이다. 시민의 승리, 명백한 승리였다. 애석하게도 나의 세대는 그날 이전까지는 이런 승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87년 민주화 항쟁과 그에 따른 학살자의 퇴진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 20대는 1년을 제외하고는 보수 정권 하에서 보냈다. 2008년의 촛불은 정권을 교체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고, 후일에 오명을 뒤집어썼다. 우울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국정농단의 장본인이 물러나 구속되었고, 새로운 정치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제야 봄이라 할 만하다.

 

  아직도 서울시청 부근에 가면 소위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모양이다. 그 한줌의 지지자들이 있다고 해서, 대통령 탄핵이 있게 만든 국정농단이 우리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상식은 갱신된다. 갱신의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쟁점을 상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국정을 제멋대로 하면, 법에 의한 심판을 받는다. 시민의 상식이었고, 우리는 그날 상식의 실현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전보다 상식적인 사회가 되었으니 시민들의 불행도 줄어들까? 적폐만 청산되면 시민의 상식은 자동으로 갱신될까?

 

  2016년 5월 17일. 한 여성이 강남역 근처의 공중화장실에서 남성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내가 이날 목격한 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느끼는, 실재적인 공포였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경찰은 사건 용의자에게 조현병 증세가 있었으며, 따라서 여성혐오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일부 성차별주의자들은 그 발표를 그대로 믿기로 했다. 어쩌다 정신병 있는 사람에게 잘못 걸린 피해자에게는 애도를 표하지만, 남성혐오로 사건의 논조를 끌고 가는 언론과 그에 동조하는 ‘메갈’, ‘페미’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운운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 간에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고 평등을 이룩했는데 일부 극성 ‘페미’들이 문제일 뿐인 걸까? 그래서 2015년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니 ‘쟤네들 남혐한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쉽게 낙인찍을 수 있었기에 여성의 삶과 고난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기로 한 것일까? 정말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늦은 밤에 택시를 탈 때, 처음 보는 건물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퇴근할 때, 자취방에 나 혼자 있을 때, 나는 내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해 끝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삶, 존재에 대해, 생김새에 대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온갖 평가를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듣는 삶, 참다 참다 참지 못하고 감정을 표출하면 ‘예민하다’라고 쉽게 딱지 붙여지는 삶, 이것은 적어도 시민의 삶은 아니다. 국가가, 시민 공동체가 여성을 진정 같은 시민으로 대우했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다.

 

  여러 측면에서 논의하고, 문제점을 수정해나가야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 중 하나는 남성 집단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것이다. 최근의 독서시장 경향을 보면 ‘시장에 2030 남성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611011744501&pt=nv). 책을 읽지 않으니 개념과 개념 사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니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가지고도 ‘난 여자 좋아하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는 흰소리가 2년째 도돌이표로 나오지 않느냔 말이다.

 

  부디, 나의 다음 세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가 강남역 살인 사건의 성격이 ‘여혐’인지 아닌지에 대한 쟁점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의 상식을 갱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우리 사회, 특히 남성들이 성 인식에 관해 반동의 양상을 보이는 것 같아 심히 걱정이 된다. 내 배우자는, 내 딸은, 나의 여성 동료 및 선후배들은 이런 사회에서 잘 살 수 있을까?

 

  * ‘이 와중에 역사한당’ 2주차 미션: 내가 생각하는 ‘쟁점으로 남을 오늘의 역사’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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