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잡이들
은승완 지음 / 들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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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만큼 치안 상태가 좋은 나라가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한국은 해가 지고 난 한참 뒤에도 도시 번화가의 불이 꺼지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며, 어지간해서는 총기 사고가 발생할 일도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현상일 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총칼을 벼리고 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 보상의 시스템이 무너져 더 이상 시스템에 의한 구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누구든, 무엇이든 쏠 준비가 되어 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총잡이들’은 크게 ‘한 방’을 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주변부 인생을 살고 있는 세 사람이다. 등단했으나 소설 창작보다는 생계유지를 위한 ‘잡문 콘테스트’에 매진하는 공노명, 마찬가지로 청탁을 거의 받지 못해 잡문 콘테스트로 눈을 돌려 업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소정훈, 개인적으로 큰 빚을 져 공노명과의 협업을 시작하게 된 최보희. 3억이라는 돈은 표면적으로 ‘좋은 소설’에 상응하는 대가이지만, 세 사람에게는 이들을 모이게 해 준 유일무이한 동기이자 최소한의 구속점이다. 문학은 애초에 증발했다. 단순한 동맹에는 인정이나 배려가 설 자리가 좁다. 3인조가 서로에게 잠깐씩 인간다워졌다가 다시 ‘찌질’해지는 모습을 보는 독자는 그들을 마냥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총잡이들』은 일차적으로 소설가 소설이지만, 소설(또는 예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만 천착하는 이야기로 머무르지는 않는다. 소설은 묻는다. ‘가치’와 ‘과정’이 시민 개개인에 의해 내팽개쳐진 사회는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인가? ‘목적의 왕국’에서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악당이 된 총잡이들. 그들은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 하지만 그들이라고 최고의 총잡이를 꿈꾸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비겁한 악당이 되고 싶었을까. 천만의 말씀일 것이다. 단지 그들은 가난에, 삶에 패배한 자들일 뿐이었다.’(145-146)

 

  공노명은 공모전 제출용 소설의 속 이야기를 쓰며, 속 이야기의 배경인 미국 서부 시대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다 악당들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타고난 악당’은 없다. 악당은 ‘패배자’, 그것도 비자발적 패배자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각자의 주판알을 굴렸던 최보희와 소정훈, 소설가인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총질 권하는 사회’에서 마지못해 총을 들었을 뿐이다. 공노명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삼류 총잡이들, 조금은 악당인 그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쳐다본다. 그 시선에는 순수한 미움이 없다.

  3인조 개개인에게서 비치는 낭만주의적 문학관은 이 소설의 조준점이 어디인지 의구심을 품게 할 수도 있겠다. 완전한 전복을 꿈꾸었던 독자들로서는 김이 새는 부분도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소설가 소설’이라는 익숙한 해석의 틀을 들어내고 나면, 이 소설은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총은 왜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총을 내려놓고 옆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는가? 한국 사회의 축도인 노량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부극의 배경음악처럼 대혈투를 암시한다. 대혈투를 실제로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이 소설을 매개 삼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얼마나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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