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토마토를 과일 샐러드에 넣지 않는 것은 '지혜'라 할 수 있다
과일
샐러드라는 단어에는 왠지 이걸 과일 '사라다'라 불러야 할 것 같은 20세기 한국 출생자 특유의 어색함이 잔잔히 남아
있다(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과일 '사라다'가 최악인 지점을 솔직히 털어 놓자면, 토마토 보다는 그게 마요네즈에 버무려진다는 것과
건포도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런
생뚱맞은 제목을 붙이며 잠깐 찾아 본 과일과 채소의 차이를 대강 정리해 보자면, 식물학적으로는 꽃이 진 자리에 맺는 것을 열매라
칭하는데 이를 다시 식품공학적 한국어로 재정의하면 이중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과일',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열매 외
식물의 기타 구성을 '채소'라 부르는 것 같다.
이왕
개인적인 '사라다' 취향을 털어 놓은 김에 솔직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 시절 나는 공부 보다는
입시 자체를 둘러싼 공부법이나 신변 잡기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20세기에 입시 공부를 잘한 걸로 유명했던 형제 뮤지션
팀(이렇게만 말해도 20세기 사람들은 누군지 바로 알겠지?) 두 사람의 공부 방식이 아주 상이했다는 이야기를 주워 들은 일이
있었다. 한쪽이 이론을 탄탄하게 갖추고 그걸 예제에 적용해 푸는 톱-다운(연역) 방식이었다면, 다른 한쪽은 다양한 예제를 접하며
그게 정리되어 이론이 되는 보텀-업(귀납) 방식인데 둘 중 입시에 더 효율적인 쪽을 고르라면 단연 후자라는 내용이었다. 뭐, 이
예시의 두 사람처럼 공부를 충실히 한다는 전제만 성립한다면 결과적으로 방식은 크게 상관이 없다. 현실 세계의 입시는, 방법이야
어쨌건 공부를 하는 파와 나처럼 방법에만 정신을 팔며 공부와는 담쌓는 파로 나뉘니까.
그런가
하면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냅이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부딪힌 방식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공부와 담쌓는 파 말고, 다양한 예제를
직접 접하는 쪽). 때론 읽기 괴로울 만치 처절하기까지 한 그의 고군분투기, 《욕구들》을 읽고 나면, 서론 말미의 이 문단에 새삼
가슴을 쓸어 내리며 뭉클한 감동마저 느끼게 된다. 끝내 살아남아 버텨 준 자를 향한 경외감이라 해야 할까?
오늘날 내게 좋은 하루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조정은 나 자신이 유능하고 강하며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활동이다. 또는 하루치 일을 견실하게 해낸 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친구와 웃으며 통화한 날, 좋은 음식으로 식사한 날, 혹은 밤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와 포옹한 채 시간을 보낸 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원제 'appetites--욕구들'의 사전상 의미는 "허기를 채우고자 자연스럽게 뭔가를 원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석하고자 저자는 자연계에 속한 인간종의 원초적 감정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여러 감각 기관을
동원한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먹는다'는 행위와 '본다'는 행위다.
여자들이
정체 모를 허기(나라면 '사회적'이라는 수식을 붙이고 싶은 허기)를 채울 목적으로 도리어 먹는 행위를 조절하고 해로울 지경까지
몸을 비우게 된 모순은 결국 보는 행위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게 되면서, 즉
인간 사회의 여자들이 '보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는 존재'라는 관념이 널리 퍼지며, 여자들은 먹을 자유를 비롯해 여러 자유를
억압당한다. 이러한 자유와 욕구는 오히려 너무 원초적인 탓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해 왔지만, 저자는 이것이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속박임을 몸소 겪은 방대한 예시를 동원해 충실하게 정리한다.
내
부모님과 같은 해에 태어난 캐럴라인 냅은 2002년 6월 3일, 지나치게 이른 나이 마흔 둘에 폐암(자살이 아님을 꼬집고자
순전히 내 욕심으로 구태여 부연하는 병명)으로 이 세계에 작별을 고하지만, 생전 그가 여성의 욕구를 입 밖으로 내며 또 한 번
발발한 이 전쟁에서 저자의 사후에 출간된 회고록 《욕구들》은 명백히 "끝"이 아니라 "시작"을 말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우리의 이 전쟁은, 어쩌면 언젠가 윈스턴 처칠이 마주한 것 이상으로 길고 지난하며 참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욕구들》을 읽고 지금 이 리뷰를 남기는 나조차도 오랜만에 발견한 내 몇 년 전 사진을 보며 '그때보다 더 살찐 나도 괜찮아'
같은 생각을 애써 하면서도 깊은 내면에는 '그래도 저때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같은 찌꺼기 같은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더 철저하게 그럴싸한 여성주의적 사고로 표면을 둘둘 감은 뒤 그 속으로는 그와 상충하는 생각들에
잠기기도 하니까.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동원해 "내 인생은 아무 문제 없다는 환상"을 유지하듯(《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캐롤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하지만
이런 생각들마저도 자연의 일부임을, 나는 캐럴라인 냅의 사유를 빌려 다시금 확인했다. 그래서 여성주의 측면에서 다소 떳떳하지
못한 생각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이제는 그냥 내 탓을 하며 더 철저히 나를 숨길 고치를 짓기 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그 속에 더 깊이 잠기지도, 더 멀리 달아나려 애쓰지도 않고 그냥 그 본능과 욕구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그 안에는 내가
있기도 하고, 이 사회의 단면이 담겨 있기도 하다.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듯, 차분한 마음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며 "보이는" 시선
대신 내가 직접 "본다"는 감각에 빠져 있는 동안 은은하게 나를 채우며 허기가 해소되는 경험은 단순한 지식만으로 일깨우기 힘든
과정이다.
복잡다단한
자연계의 삶이란 게 본래 그런 것이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순전히 인간끼리 만들어 낸 산출물이라면, 우리의 삶은 인간종을
훌쩍 초월하며 쉽사리 다독여 정리할 수 없는, 말하자면 자연이 출제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 범위 내에서 '토마토는 과일이다'와
'토마토를 과일 샐러드에 넣지 않는 선택' 즉,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늘 분명하거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범주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과 고립의 구분이 그러하듯(《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이론과
예제(혹은 실전), 어떤 것을 앞세우든 결국 둘은 진실이라는 접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이를 구분하는 방법론
자체는 부수적 장치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건 진실과 그 속에 숨은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자유를 추구하려 꾸준히 나아가는 노력이
아닐까. 이러한 노력과 의지의 씨앗을 우선 심었다면, 캐럴라인 냅의 저작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게일 콜드웰이 쓴
서문처럼, 캐럴라인 냅이 투병 시절 집필한 《욕구들》은 그가 남긴 유산이자 희망의 모음이다. 이 새로운 희망은 어쩌면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에서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1977)〉으로 이어지는 '데스스타의 설계도'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2021년 블로그 포스트 '최악의 비유상' 후보에 오를 법한 문장…).
이
책의 프롤로그 속 문장을 따라 읊조리며 캐럴라인 냅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소원 역시 우주에 가닿길 바라 본다. 우리가, 여자들이
몸도 마음도 충만히 채워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모쪼록 그가 이미 가 있을지 모를 저 멀고 먼 어느 우주까지 뻗어 가기를.
책
바깥의 이야기로 리뷰를 마무리하자면, 《욕구들》이란 제목은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문법상 가산(욕구들), 불가산(욕구) 명사 모두 쓸
수 있는데, 'appetites'라는 가산 복수 명사로 된 제목에서 총괄적이면서도 여러 갈래로 세분화된 욕구라는 어감이 동시에
느껴져 좋았다. 또, 국내에 출간되어 현재 유통 중인 캐럴라인 냅의 저서 총 네 권의 번역자가 총 세 분이라는 점도 무척
재미있는데(?) 같은 저자의 다른 문장을 각자의 연륜으로 탁월하게 옮기면서도 개별 번역자의 매력이 잘 살아 있어 충만하게 채워지는
독서의 경험을 제대로 선사한다. 국내 외래어 표기법이 보편화되기 전 '나무처럼'에서 출간된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과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는 작가명 표기를 "캐롤라인 냅"으로 하고, 비교적 근간이자 작가의 사후 출간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바다출판사'의 《명랑한 은둔자》와 '북하우스'의 《욕구들》은 "캐럴라인 냅"으로 쓰니, 도서 검색에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
덧붙여,
《욕구들》은 일찍이 프로이트를 통해 유명해졌다고 전해지는 "여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What do women want)?"라는
여자들의 욕구를 납작하게 싸잡는 질문을 차용해, '여성의 욕구를 만들고 정의하며 통제하는 문화에서, 여성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대체 무슨 수로 알아내고 이를 받아들이는가(How does a woman know, and then honor, what
it is she wants in a culture bent on shaping, defining, and controlling
her desires)?'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작품이라고 한다(출처는 아마존 책 소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자들에게 교묘히
금지돼 온 여러 욕구를 파해쳐 보고, 다시금 책의 부제이기도 한 이 질문('여성은 왜 원하는가')을 이렇게 따져 되묻고
싶어졌다. "여성은 이제까지 왜 원하지 못 했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캐럴라인 냅이 남겨 준
데스스타 설계도… 아니, 새로운 희망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