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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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만, 상대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삶의 스팩트럼에서 나는 불행한 쪽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임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이다.

나 자신을 두둔하자면,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거의 범죄자가 될 뻔했던 날들 이후로는 학생들과 지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애썼지만,

나는 현명한 도덕군자도 아니고,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

그날의 약속들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도 아니다.

15p

인간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들을 빌려 인간의 실존을 고찰한다. 철학책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책 디자인에 넘어가서 선택한 책이다.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때때로 우리를 잠식해오는 불안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자유, 즉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을 선택해서 실현하려 애쓰며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필연성은 불안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낭떠러지 끝에 선 사람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했다.

천길만길의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머리가 아찔하고 뱃속이 뒤틀리며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뛰어내릴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61p

세속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에서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들의 개념 자체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 등장하는 철학자들마다 각자의 정의를 내리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우리의 불안은 질병이 될 수도, 마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질병이라 해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는 키르케고르 뿐만 아니라 니체, 사르트르, 헤겔, 아리스토텔레스, 카뮈,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몇백년에 거쳐 있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뛰어넘으며 우리의 감정들에 대해 설명한다.

반대로 암울하고 우울한 고투의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건강한 편이라고 판단했다.

1846년의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진실로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광기에 가까운 이런저런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 마음과 육신 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그 고통은 내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무척 놀라운 사실이며, 여기에서 나는 무한한 용기를 얻는다.

96p

당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훈련이다.

키르케고르도 이런 상상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생각은 현재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생각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경박할 수 있고,

지나치게 명랑하거나 지나치게 음울할 수 있다.

엽기적인 환상이든 기막히게 멋진 공상이든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이 끝나고 더는 시간이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관점에 대해 깊이 감추어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가 된다.

121p

"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111p)"

"죽음이 명확해지면,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될 수 있다. (125p)"

3장에서 톨스토이는 진정성과 형제애가 없는 삶은 영적인 죽음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행할 정도로 죽음은 인간 실존 그 끝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를 넘어선 나의 세번째 자아는 어떤 것이며 나는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같은 장에서 언급된 '죽음을 상상하는 훈련'이라는 말에서 나는 갑자기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지내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이용했던 엔딩이. 심지어 중간에 아버지도 죽었고(...). 사랑까지 제대로 쟁취한 이 사람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 아닐까. 신앙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 키르케고르의 설명을 저자는 약간은 세속적으로 이끌어낸다. 죽음이 두려움보다 슬픔이 되는 삶의 끝을 맞고 싶다.

따라서 친절에 대한 내 확신은 나 자신에 대해 나에게 말하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항상 친절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내가 상상하고 싶어하는 것만큼 내 진심에 가깝지 않다는 뜻이다.

실존주의에서 언급되는 미덕들은 자신에 대해 정직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진정성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생각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물음에 솔직하기를 바란다.

149p

몇몇 흥미로운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은 명확한 대상을 갖지만 불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우울과 절망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 개념들을 혼동한다. 이러한 혼란은 때로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우울을 절망으로, 병리적인 것으로 착각해버리고 감정에 또다른 의미들을 부여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그것이 나를 압도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어 나태와 소극적인 수용의 위험성을 2장에서 경고한다. 심지어 4장에서는 '타락'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상당히 뜨끔하다. 어딜내놔도 나태함으로 뒤지지 않는 나로써는 그것에서 오는 어떤 무력함과 우울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어떤 것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어떻게(150p)' 실행하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나 스스로 진정성이라고 믿는 것에는 자아도취적 위험성도 동반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것과 강력히 유대해야 하지만 이 또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인간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동물이다(머리아픔)

누구도 애초부터 겁쟁이로 태어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믿고 싶겠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도덕적인 전환은 가능하다.

사르트르가 성경 이야기에 감동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재로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부인했을 때,

당신은 베드로가 가롯 유다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용기를 되찾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197p

도덕적으로 말하면, 유혹은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는 동시에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주체감을 약화시키면, 우리의 도덕적 이해력도 조금씩 떨어진다.

키르케고르였다면 '변증법적'이라고 칭했을 이런 역학 관계 때문에,

우리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며

'너희가 지금은 이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겠지만 머잖아 알게 될 거다'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이상적 생각들을 어떻게 끊어낸다는 것일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당신이 발성하면 냉대를 받거나 승진에서 탈락하게 될지도 모를 진실의 폭로를 늦춤으로써

당신의 도덕적 이해를 은근히 덮어버리게 된다는 말일까?

출세제일주의, 성공으로 보장되는 물리적 안락함과 소속감 등은 희생이 요구될 때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222p

물론 고든 마리노는 책 전반에 걸쳐 개인의 통제력과 감정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항우울제 복용 등도 우울의 감정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핵심은 스스로가 유약한 인간이라는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되, 스스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수단으로 우울을 생각할 줄 아는 어떤 내공(?)을 살면서 좀 키워야 하지 않을까. 철학이 목표로 하는 지혜의 수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 연민을 보내라는 말이 약간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삶을 살아야하니.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authenticity란 무엇일까. 4장에서 아주 명확한 해답을 뚜렷하게 내리지는 않지만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가 결국 그것이겠지. 5장에서 언급한 신의 존재조차 신앙의 상실은 우리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신뢰의 방식과 욕망 또한 우리의 선택이라고 하기 때문에. 6장이 다루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진정성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끌어내는'과정.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만 동시에 가짜후회가 아닌 '도덕적 후회'를 가슴 깊이 간직한다.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228p)."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한 의무도 사랑의 책무 중 하나이다.

달리 말하면, 사르트르와 카뮈와 니체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누구나 사랑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244p

그럼에도 마지막 장은 결국 '사랑'이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레기네와의 사랑에서 찌질한(...) 모습과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인간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때로 온유함과 거리도 멀고 어색한 결과를 만드는 행동을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의무'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개념들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울 수도 있겠다. 저자도 그들이 가지는 모순이나 허점을 지적하지만 여기서 어떤 교훈들을 끌어내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수많은 저서들과 말을 남긴 이들의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는 부딪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한 편이 된다는 점이다. 그 중 한가지, 삶은고통인 동시에 선물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의 생각조차 변덕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저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자기고백적 조언들은 분명 어떤 용기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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