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훔치는 사람들 - 누군가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 지음, 홍지수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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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생각,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고 어느 순간 판단이 된다면, 사실 그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을 듯합니다. 명 백하게 외부의 강요에 의한 상황이야, 그를 벗어난 후 취소를 하면 그만입니다. 반면, 내가 TV룰 시청하고, 영화를 관람하고, 쇼핑을 하면서 내리는 결단, 선택이, 알고 보니 교활한 상인, 영리한 기업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었다면? 불쾌감을 넘어 불안까지 생깁니다. 별 필요도 없는 곳에 돈을 지출했다는 자책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의 기호, 나의 취향이, 고작 외부적, 혹은 생리적(이 역시 외부에 의해 조작된) 자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대체 나(최소한 "나"의 일부)는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정한 자아의 소산인지 근본적인 회의가 닥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자 데이비드 루이스는 "뇌" ,"인간 심리", 그리고 "구체적인 구매 결정" 사이의 연관 관계를 파헤치는 "뉴로마케팅"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분입니다. 뉴로마케팅을 주제로 한 책은 요즘 여럿 나오지만, 이 책은 1) 현재 최신의 연구 성과가 빠짐 없이 제시되어 있다. 2) 광고에 관한 그 최초라 할 시기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있다. 3) 다루는 주제의 무게에 비해 재미있게 적혀 있다. 이 세 가지 점에서 뼈어납니다. 이런 좋은 점을 두루 갖출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저자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란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광고의 정의는 무엇인가? 서양인들은 어느 분야에서건 흔히 "이성"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한국 전 당시 맥아더를 만난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모 인사의 모습을 두고 "한국인들(나아가 동양인들)은 터무니없이 감정적이다."라며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런데 광고란, 대중의 감성에 특히 호소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발견한 것도 이들입니다. "광고란, 종이에 인쇄된 세일즈맨십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오늘날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이 사실을, 그리 당연하다고 여겨지 않았던 전 시대의 통념은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광고란, 제품에 대한 정보를 사실적으로, 정직하게 전달하는 작업이다. 소비자의 이성에 호소하기만 하면, 광고는 그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어찌 보면 사고의 퇴보, 도덕의 타락처럼 들리기도 하는 시대의 변천(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내지 환멸)입니다. 정직한 말보다 달콤한 사탕발림이 우선이라는 암시도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중 대체 얼마 정도가 사탕발림에 혹한 결과이며, 어느 정도가 이성적 판단, 독립된 나 자산의 선택인지 아는 건 중요합니다. 1) "파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이 시대의 모토처럼, 생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이며, 2) 나 자신만이라도 외부의 자극이 아닌, 이성적으로 나 자신만을 위한 소비를 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뇌가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게 이 진술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머리에 자리잡은 그 뇌요. 다른 하나는 장 부위에 자리한 신경계입니다. 우리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도 반응하지만, 장이 시키는 대로도 따라서 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기대가 배신 당했을 때 속이 쓰리다거나 한 건  "유령 감각"처럼 착각의 소산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기에서" 무언가를 두고 감각과 의사의 중추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뇌"가 느끼는 것입니다. 식욕을 절제 못하고 쉽게 먹어서 살이 찌는 사람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배와 뇌가 싸워서 배가 이기는 횟수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광고란 바로, 이 불가사의한 생리작용, 감성적 반응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배"를 공략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역하 광고"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실까요? 식역이라는 말은 한자로 識閾이라 쓰며, 우리의 인식 범위를 지칭합니다(역치 이상의 자극이라고 할 때 그 "역'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부위를 자극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결과가, 여러 연구, 그리고 직관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1957년 제임스 비케리는 사람들이 채 알아챌 수 없는 짧은 간격으로 스크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에 여러 번 "코카콜라", "팝콘" 같은 메시지를 쏘아서, 이를 본(볼 수 없었으나 어떤 경로에서인지 "본") 이들에게 해당 상품을 구매하도록 "조작"한, 당시로서나 지금이나 혁신적인(그리고 충격적인) 광고(과연 광고라고 할 수 있다면요) 기법을 공개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공공의 적이 된 그는 잠적했다가 몇 년 뒤 돌아와서는, "식역하 광고란 유명세를 타 보려고 거짓을 과장했을 뿐이었다. 그런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며 고백 반 발뺌 반의 의사표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식 수준이 일천했던 그가 그 위험성, 위력을 제대로 이해했건 그렇지 않았건 무관하게, 식역하 자극이란 실재하는 개념이고 실체"라고 확언합니다. subliminal에서 limin-라는 어근은, 저 위에 적은 閾과 의미가 같습니다. 한자나 영어(라틴어 어근)나 모두 "문지방"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감성적 결정을 관장하고 구체화하는 부분은, 현재는 감각시상(sensory thalamus)과 섬피질(insular cortex, 더 흔히 쓰는 lobe라는 용어를 적용하면 뇌섬엽이라고도 합니다. "섬"은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 섬 그것입니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슈퍼컴퓨터보다 강력합니다. 슈퍼컴보다 더 많고 효과적인 연산을 할 수 있고, 슈퍼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연료를 소비합니다. 수백만 년 사이에 걸쳐 실로 신비하게도 진화해 온 뇌에 대해, 그것을 쓰는 우리 자신도 아직 작동 기제의 실체나 구조를 모르고 있습니다. " 모른다"는 의미는, 이성의 존엄한 본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고, 이성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서 거의 반대 성향의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펼치는 "감정, 생리, 욕구"의 부분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건, 과거에 성공한 광고의 사례는 이 영역을 아주 효과적으로 공략했었기에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건 그 "숨겨진 뇌"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슈퍼볼 결승전에서 광고한 애플 매킨토시의 경우, 경 영진은 한결 같이 "1984의 모티브를 채용한 새 광고"에 대해, 소기의 전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며 낙제점을 주고 기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고 괜히 광고비를 날릴 위험에 처하자 그대로 집행했는데, 이것이 사상 초유의 대박을 치고 오늘까지 전설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광고의 본질은, 가장 물건을 팔아야 할 필요가 절박한 판매자조차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곳에서 그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카너먼의 행동 경제학 원리부터 해서, 뉴로마케팅에 대해 거의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담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사례가 풍부하며, 정보의 나열이 아닌 권위자의 진단, 스토리가 뚜렷하므로 독자가 어떻게 읽어도 배울 게 있습니다.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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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박동규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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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육신을 준 분일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어느 역경과 시련, 유혹으로부터도 타락이나 훼손을 겪지 않게 지켜 주는 양분과 보호막을 제공해 주는 원천입니다. 이로부터 형제애, 동료애, 우정이 나오고, 마침내 보편적 인류애로까지 정신이 성숙하는 것이겠습니다.


박동규 교수님은 개인의 학문적 성취, 문학적 품격을 떠나서도, 참 푸근하고 자애로운 인격을 지닌 분이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시인의 삶은 배고프고 내일에의 보장이 없는 위태로운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박목월 선생은, 넉넉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애정과 진실, 굽히지 않는 지조라는 미덕을 자녀들에게 심어 넣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인 목월이 남긴 그 불후의 명시들보다 더 갚진 작품은, 바로 그의 자제분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름답고 포근한 가정사의 살아 있는 예를 통해 우리 대중에게 전해 주시는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교수님의 전작(이라고 하지만 바로 직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보다 이 책이 더 오래 전에 초판이 나왔더군요. 이 책은 10년 전에 나온 같은 제목의 책의 개정판입니다)에 비해, 아버지 외의 가족, 어머니, 형제분들, 할머니 등에 대한 추억이 더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가 대학 진학 직전의 사연에 더 치중했다면, 이 책은 그 이후의 "속편"이 더 풍성히 실려 있습니다.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를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읽으신 분이라면, 이 책도 꼭 한번 같이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우리들은, 과연 가사일과 농사일에 시달리느라 나무토막처럼 변해버린 어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아 본 기억이 있을까요? 요즘이야 할머니들께서도 얼마나 멋을 내고 젊게 꾸미고 다니십니까. 풍요해질대로 풍요해진 요즘 세상에서, 이 역시 지나간 시대의 안타까운 회고에 불과한 지도 모릅니다. 교수님이 갓 대학에 입학하셔서 서울대학교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실 무렵, 아직 동생들이 채 어릴 시점에 조모님과 함께 살게 되셨다고 합니다. 효자이신 박목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문득 손을 만져 보니, 마디가 잡히지 않고 온기도 없는 나무토막 같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자리에서 박 교수님이 이 말을 입밖에 내어 표현했다는 거죠. 교수님은 즉시 잘못을깨닫고 부모님께 사죄합니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모친의 손을 잡아 보니, 그때 할머니의 손과 거의 똑같이, 마디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 예전 할머님이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애고, 내가 방금 이 참외를 괜히 베어 먹었네. 이걸 팔아 너희들 학비에 보태야 하는데.." 한국인이라면 이 일화들이 남의 말 같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전 L모 대기업 가문에서 상사 부조금의 분배를 두고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돈 앞에서 형제도 부모도 없이 추악한 싸움을 벌이는 게 요즘의 세태입니다. 박 교수님은 자신의 친척 중에, 그야말로 "흥부네"라 불릴 만큼 자녀가 많고, 그 빈한한 삶 속에서도 결코 형제 사이의 우애를 잃지 않은 어느 일가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몇 십 리 바깥까지 모든 형제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서, 기어이 형제의 잃은 소를 찾아 주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흥부는 못된 형을 두기라도 했지만, 이들 형제들에게는 놀부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아파트 단지(강남 한복판입니다)에서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이런저런 곤충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울 시내에 곤충이 있어 봐야 몇 마리나 있겠으며, 그 종류 또한 얼마나 빈약하겠습니까만, 그런 드문 모습을 도심에서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어요. 박 교수님은 어려서 메뚜기를 잡으러 다닌 이야기를, 이 책에서 재미나게 풀어 놓으십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아버지가 아버지스럽고, 어머니가 본연의 모정을 잔뜩 간직한 곳, 그곳이 바로 전원입니다. 여기에서 아이들도 본연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바르고 착한 모범 시민, 공동체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않아야 할 일은, 바로 이런 영혼의 본원적 고장,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감화력과 치유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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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 제너레이션 - 스마트 세대와 창조 지능
하워드 가드너 & 케이티 데이비스 지음, 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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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시대입니다. 거리의 광고판이 제 효용을 잃을 만큼,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작은 디바이스의 화면에 눈을 집중시킵니다. 이렇게 작은 세계에 주의를 집중하면, 사람들과는 점점 더 소외되어 자아의 고립을 촉진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SNS는 웹 시절부터 있던 것이지만, 모바일 시대를 맞이하여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화면에 고개를 묻고 지내는 세대는, 이전 세대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던 의미에서 "소셜"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나이든 이들은 과연 이것이 "소셜"인지 아닌지도 의아해합니다. 분명한 건 이 트렌드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고, 이 트렌드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버드 대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이런 "또하나의 신세대"를 가리켜 "앱 제너레이션"이라고 명명합니다. 어느 데케이드의 10대들도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지 않고 자라는 일이 없으니,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변화가 빠르긴 한가 봅니다. 어느 미래 세대도, 그 앞 세대를 닮지 않고, 새로운 개성을 키워 나간다는 점은, 좀 과장하자면 진화를 촉진하는 건전한 움직임입니다. 뿌듯한 일이고 장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지금까지의 무슨무슨 세대에 대해서는, 다소의 (부작용처럼 언제나 끼어 들기는 했으나) 우려를 깨끗이 불식할 만큼, 찬양과 기대가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새로이 "발견"한, 이 "앱 제너레이션'은, 그런 장밋빛 전망과는 상당히 큰 폭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단 이런 추세가 아무 제동 장치 없이 전행되는 사태에 대해, 적신호를 울리고 있습니다. 사실, 앱(여기에는 물론 SNS 미디어 뿐 아니라 게임 등 모든 애플리케이션 환경이 다 포함됩니다)의 매커니즘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학부모들과 전문가들이 일찍부터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가드너 교수의 주장이 갖는 차별점이라면, 이런 모바일 중독을 전체 세대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 포괄적, 사회학적 접근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이겠습니다.

 

앱은 TV의 부작용과는 또 다릅니다. TV가 투영하는 세상은, 실제의 세계와 아주 차별화한 별천지만은 아닙니다(그런 것도 일부 있지만요). 시청자가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어느 정도 잘 기능하는 필터를 통해 자신에 해롭지 않은 부지런한 해석을 거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반면 모바일의 앱은 개인과 완전히 밀착한 소통 방식입니다. 어느 것이 자아이고 외계이며, 진정한 실재와 모바일이 구현한 버츄얼이 무엇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앱의 논리는 현실과 대단히 동떨어져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SNS에는 아이가 만나고 접촉하며 때로 적대하는 실재 인물들이 다 구현되고 활동하고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며 왜곡과 오해가 끼어 들 수 있다"는 최소한의 경계심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가드너 교수는 "앱이 아이들 창의력을 망칠 수 있다"며 강력히 경고합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나 게임이 끼친다고 경고받던 여러 위험과는 또 차원을 달리하는 경지입니다. 앱은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아직 인격과 성숙한 감성이 채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동할 때도 언제나 몸에 휴대하는 기기가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여러 압력이란, 이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가드너 교수는 과거로의 회귀만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이 트렌드가,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앱 제너레이션, 앱 에이지의 밝고 희망찬 면도 넉넉히 지적할 줄 압니다. 도구가 늘어나면, 같은 창의성도 움츠려듦 없이 더 마음껏 나래를 펴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구글이라는 놀라운 검색 엔진이 제공하는 무한에 가까운 리소스는, 기존의 창의성을 다른 레벨로 도약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전 그 어떤 천재도 누리지 못 했던, 앱 세대만의 특권이자 비장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온라인은 집단 따돌림, bullying도 존재하지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광폭의 소통과 실시간의 동시간 의사 교환이 가능합니다. 이는 도전인 동시에 기회의 새로운 창출입니다.

 

중요한 건 부모의 올바른 양식과 사회의 건전한 관심입니다. 앱은 사실 위협이나 도전이라기보다, 이전 그 어느 부모나 자식 세대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도래입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고, 그 응전을 효과적으로 이뤄 왔기에 오늘의 번영하는 인류가 생존해 있는 것입니다. 가드너 교수가 주장하는 건, "이대로는 아이들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기업이 미증유의 환경을 조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면, 일찍이 없던 정신과 영혼의 성장과 진화, 그리고 소통과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이 "앱 제너레이션" 앞에 제시된 분명한 옵션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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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주고 슈퍼팬에게 팔아라 - 열성팬을 만드는 프리 마케팅 전략
니콜라스 로벨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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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건을 그냥 주라는 게 무슨 말일까요? 경제활동은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설사 내가 길에서 주은 물건이라고 해도,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그냥 주라면 마음이 내키지 않겠습니다. 애써 내 노력을 투입해서 만든 물건을 일단 공짜로 주고 시작하라? 무리입니다. 잉여의 자원과 노동만 소비한 산물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합니다.

 

저는 이 저자 로벨의 주장을, 다른 매체에서 전에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가 하는 말 중에 특색 있는 논거 몇만 추리고, 나머지는 귓등으로 흘렸던 기억입니다. 이번에 그의 주장이 이처럼 강력하게 보강되고, 불륨도 늘려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을 보고, "대체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하는 배경이 뭘까? 내가 채 깨닫지 못한 무엇이 확실히 더 있었단 말인가?"하는 의문을 품고 책을 사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가격이란 합리성을 본질로 합니다. 독과점 시장이 아니라 (우리 자본주의의 영원한 샹그릴라인) 완전경쟁시장이라면, 이에서 형성된 가격은 누구에게도 치우친 이익을 주지 않는 공평한 배분 기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는데, 이에는 "신의 섭리" 같은 걸 상정하고 표현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가격은 누구보다 공정한 심판이며,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무익하고 반사회적입니다. 아니, 이런 전지전능한 신, "가격"의 존재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시장에 공짜로 나눠 주라니, 이는 부질없는 자살행위인데다, 신성 모독까지 겸한 패착이 아닐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출발점은 이렇습니다. "소비자, 대중이 합리적이지 않다. 최소한, 합리적인 인간이 소비자 대중의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판매자, 공급자, 기억 역시, 그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한다." 로벨은 예의 그 충격적인 해법을 또다시 내어 놓습니다. "다양한 가격의 상품을 제시하라. 일부는 공짜로 줘 버려라."

 

경제학 이론의 기본은, "독점적 경쟁 시장에서 공급자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프라이스 세팅의 자유가 있다"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일단 어느 정도의 제품 차별화가 필요합니다. 제품이 만약 차별화되지 않았다면,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의 차별화라도 필요합니다. 어느 쪽이건, 일단 생산자는 그런 바람직한 결과물 형성에 정직하고 가치 있는 노력과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어떤 차원에서건 최소한의 정당성은 확보됩니다.

 

다시 경제학 교과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시장의 신은 가격입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진리입니다. 그런데, 조지 오웰의 어느 명언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한 법이죠. 수요곡선은 어느 국면에서나 우하향하지만, 국면에 따라 더 가파르게 우하향하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를 치고 들어가라는 게 로벨의 주장입니다.

 

어느 구석이 그처럼이나 "불공평하게" 가파른 우하향일까요? 1원에서 0원으로 넘어가는 문턱, threshold입니다. 이 경계선은, 이 공간과 저 공간의 질(質)을 가르는 파티션입니다. 1원까지만 해도 무덤덤하던 이들이, 0원이란 표식을 보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이 상품은 이제 모색, "간보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손에 잡아 채어야 하는 쟁취의 타깃입니다. 왜? 공짜니까요. 내가 아무런 예산 제약 걱정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고, 그를 획득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 지 머리를 굴릴 필요와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짜는 이처럼, 비이성적인 열광의 대상입니다.

 

비이성적인 열광은 이 공짜 진영의 반대편에 또 하나가 그 방향만 달리하여 자리합니다. 바로 "팬'입니다. 이들은 그저 브랜드와 제품에 충성도가 강한 이들이 아닙니다. 그 브랜드를 지지하는 "슈퍼팬"입니다. 이들은 해당 제품을 향해 자신의 그 무엇이라도 던질 용의가 있습니다. 로벨의 주장은, 비이성이라는 전략적 공백이 자리하는 그 지점을 향해, 기업들과 생산자는 전력 투구를 해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지금은 기업들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어, 창조적 혁신을 넘어 파괴적 혁신까지 그 아이템과 ㄹ리스트가 소진되다시피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 이론에 사실 다 나온 진리, 그의 배리에이션을 전제로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장이 분리되어 있으면, 가격은 얼마든지 차별적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팬이냐 아니냐로 애티튜드가 나뉘는 것은, 단기간 안에 쉬이 변할 성질이 아니기도 합니다. 슈퍼팬 시장은 가격을 높이 책정하고, 레드 오션의 무차별한 지옥에서는 그대로 던져 주는 편이, 장기적 전략에서 유리할 수 있다,. 점유율은 그 자체로 강력한 기업 자산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는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이에는, 종전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강력한 외부 환경이 또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3D 프린터의 등장입니다. 우리는 만인이 셀러가 되는 시대를 넘어, 이제 만인이 메이커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런 경쟁의 풍토 속에, 기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쉐어는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이 판국에, 점유율이 단 0.01%라도 상승한다면, 그건 거의 기적 같은 그린 라이트가 아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다만 경제 외적인 이슈, 도의적인 갈등이 남아 있긴 합니다. 그저 낮은 가격, 높은 효용만을 위해 들개처럼 달려가는 대중에게는 공짜라는 선물을 안겨 주고, 나에게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슈퍼팬에게 대가를 챙기는 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아니냐는 지극히 인간적인 회오가 한 줌 밀려오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책에 실린 레이디가가의 전략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점유율을 높이고 돌고 돌아 내 주머니에 들어 온 수익은, 결국 슈퍼팬의 충성도에 대한 대가로, 다른 데서 결코 구할 수 없는 혜택을 그 슈퍼팬들에게 대폭으로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슈퍼팬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호갱 노릇"을 하려 들겠습니까? 결국 로벤의 세계에서, 생산자와 대중, 슈퍼팬은 모두가 win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종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복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니 우리 상식에서 벗어나는 바 하나도 없었다는 묘한 역설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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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열한 가지 고독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윤미성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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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잡식성이란 말은, 완전한 군집 생활도 독거 생활도 누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타당합니다. 인간은 타 생명체는 물론, 동족의 접근도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불쾌해거나 불안해합니다. 도시는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다양한 출신 배경을 뒤로 하고, 보다 큰 사냥감을 노리고 보다 풍족한 생활을 위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사는 집에서 두 발짝만 나가도 서로 어깨가 맞부딪힙니다. 우연히 마주치는 적대어린 시선은 많지만, 다사롭고 공감을 담은 눈길은 적습니다. 인간이 흔하기에 자연이 더 그립고, 사람이 지겹기에 고독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고독도 지나치면, 바로 그 자신의 영혼을 좀먹습니다.

 

이 책에 실린 리처드 예이츠의 열 한 단편은, 사실 주제와 소재, 분위기 면에서 서로 닮은 면이 거의 없습니다. R. 예이츠의 꼼꼼하고 정확한 문장, 유머러스하면서도 우수가 가득 어린 어투, 그리고 정면으로 비추었건 측면으로 살짝만 갖다 대었건 배경으로서의 뉴욕이 여튼 나오긴 한다는 점에서 아슬아슬한 공약수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열 한 편의 구슬을 하나로 꿰어주는 실이라면, 바로 "고독"이라는 키워드를 피하고서야 도무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고독"은 이 작품들의 최대공약수이자 궁극의 수렴점이기도 합니다.

 

 

잭-오-랜턴-박사

학교는 그저그런 출신 집안 애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한눈에 봐도 웬 불량스럽고 떠돌이 냄새 물씬 나는 애가 어느 날 전학을 옵니다. 구미의 배경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사범대 4년의 교육이 인간을 저렇게 바꿀 수 있을까 싶은 모범적인 교사(아니면 그저 천성일지도), 천사 같은 매너, 그리고 외모도 아름다울(?) 프라이스 선생은, 왕따 신세를 예약한 빈센트를 처음부터 배려하고 감싸려 듭니다. 그저 직업 정신의 발로일까요, 아님 타고난 영혼의 결이 그런 모습인 걸까요? 빈스는 그러나 성인인 프라이스 선생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보다는, 또래로부터의 시선에 더 큰 신경을 씁니다. 그는 최소한 동급생들만큼은 무결격의 자질을 갖추었기에, 프라이스 선생의 동정(그게 동정 이상이라고는 빈스 자신도 기대하지 않습니다)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권력자로부터 핍박 받는 동료들의 일원이자, 더 강한 정도로 억눌리는 그들의 영웅입니다. 아니면 그렇게 조작해 내어야 합니다. "선생의 자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걸?" "오, 정말?" 찌질이에서 그는 순식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바로 하필 그 순간 전학생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 결과(?)를 우연히 보게된 선생은, 빈스의 이 모든 연극을 바로 망쳐 버립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빈스의 위신은 바로 땅에 떨어지고, 소년은, 선생에 대한 나름의 관심 표현과, 또래 집단 내 신분 상승의 욕구 충족을, 더 대담한 "테러"를 통해 동시에 기도합니다. 결말은 나와 있지 않으나. 그는 짧은 순간의 영광과, 해당 시설로부터의 축출을 거의 같이 맛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여러 학교를 전전해 왔던 이유겠고, 이 작품의 속편(그런 게 있다면)은 전편의 무한 반복이 될 것입니다.

 

 

처벌광

도시인 대다수는 루저입니다. 다들 한껏 치장하고, 기 안 죽으려는 듯 대로를 활보하지만, 통장의 잔고와 암담한 내일의 전망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남기지 않고, 그 진실은 최소한 자신만은 알고 있습니다. 루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승부의 패배자라는 뜻입니다. 정해진 루저는 따라서 이번 승부의 결과 역시 전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점, 계산으로나 육감으로나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다. 기왕 패배하는 것, 남보기에 구질구질하지 않게나 보이면 그나마 나은 선택이 아닐까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쿨하게 패배하는 사람이다!" 월터는 어려서부터 가장 멋지게 쓰러지는(죽는) 연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루저의 제왕입니다. 승리자보다 그는 빛나는, 장엄한, 쿨한 모습으로 죽고 패배할 줄 압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잡고서도, 업무 능력은 거기서 거기지만 퇴직 시에 가장 태연하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해고의 순간을 연출하는 것만큼은 이력이 났습니다. 그는 해고를 알리는 고용주 크로웰의 마음을 아주 가볍게 만들어 줄 줄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월터의 무능에 신물이 난 그가 재고용을 할 기대 따위는 객관적으로 전혀 가질 수 없고, 월터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감탄을 받으며 그는 책상을 빼지만, 앞으로의 준비나 비전이란 전무합니다. 그의 마지막 명연기는 단 한 명 남은 팬 앞에서 우아하게 이뤄집니다. 이 작품에서 골계미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첫째 번역 과정에서의 스타일 휘발이고, 둘째로 약자(월터)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최대한 절제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어와 씨름하는 남자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물이 있다. 상어, 그리고 상어에 먹히는 것들.

나는 다만 상어와 미친 듯 씨름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 상어라고 생각할 만큼 과대망상자는 아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고 굳이 이곳저곳을, 더 낮아지는 대우를 감수해 가며 떠도는 이가 있습니다. 학력도 충분히 갖추지 못했는데, 내 이름이 나오는 기명 칼럼을 쓸 수 있어야 한다며 스타일도 기이한 문장을 써서 여기저기 "들이대는" 사람입니다. 딱히 불성실하고 무능한 위인도 아니라서, 그냥 배치받은 대로 하던 일만 잘 하면 대우도 곧잘 받을 터입니다. 다만 그는 스스로 평가하는 가치를 동료 뿐 아니라 상사까지도 고스란히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에게는 돈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미혼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독신이라면 무책임이 어느 정도 용인되지만, 기혼자라면 상당히 곤란한 태도입니다. "부인이 가만 계세요?" "아닌게아니라 나더러 미친..."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또다시 해직된 그에게 혹시 쓸모 있을까 해서, 좀 위신이 떨어지는 자리지만 소개를 해 주려 집에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돌아 온 답은....!

세상에는 상어와 씨름하는 남자 외에도, 그 남자를 계속해서....하는 제 4의 생물이 있었다죠.

 

 

B.A.R.맨

태어나서 군대처럼 체질에 맞고 안락한 곳은 겪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거기서 말뚝을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히틀러처럼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거나, 아니면 이 작품의 주인공 팰런처럼 될 것입니다.

히틀러도 그랬었고 이 팰런도 사회 부적응자입니다(게다가 성적[性的]인 좌절자이기도 하죠). 수입은 변변찮고, 동료들과의 호흡도 원만히 이루지 못합니다. 아내는 타자 능력이 뛰어나 다행히 남편보다 수입이 좋지만, 아내의 그런 점도 차라리 불만이고, 처녀 시절부터 삐쩍 곯아 내 스타일 아니다 싶었던 이 여자는 요즘 들어 부쩍 늙어 보이는데다 나쁜 자세로 인해 아직도 아이를 못 가집니다. 금요일은 친구, 토요일은 가족, 일요일은 휴시, 이런 패턴을 언제나 유지하던 팰런은, 아내가 금요일도 자신에게 할애하라며 바가지를 긁자 드디어 참고 참아 왓던 그 모든 불만과 좌절이 폭발해 버립니다. 이번 금요일에 그가 찾은 곳은 매번 들르건 동료들과의 그 주점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진짜 내 스타일인 여성"을 찾아 팔자에 없는 헌팅을 하러 나섭니다. R. 예이츠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나며, 그가 극우분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아주 해학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정말 좋은 재즈 피아노

카슨과 켄은 단짝 친구지만, 켄은 정확히 말해 친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카슨은 가문, 외모, 지능, 교양, 취미의 세련도, 재산, 모든 면에서 켄을 능가합니다. 켄은 성격조차도 소심하며, 같은 명문대 출신이지만 공부건 사교건 모든 면에서 카슨에게 일일이 배우고 의존해야 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번엔 웬걸, 카슨 없이 프랑스 칸느에 홀로 남겨진 켄은 느닷 국제 전화를 걸어, 바에서 평소처럼 멋지게 한 잔 걸치고 있는 카슨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뭔가를 전합니다. 카슨은 프랑스로 날아오고, 평소의 켄 답지 않게 낥카로운 안목으로 발굴한 재즈 피아니스트 시드를 소개 받습니다. 재능이 재능이니만치 재력 있는 후원자를 빨리도 만난 시드, 역시 빠른 속도로 출세를 위해 자신의 예술 스타일과 자존심을 버린 시드를 두고, 카슨은 가장 쿨한 방법으로 좌중 앞에서 그를 모욕합니다(더불어 유력자로부터의 후원 전망도 어두워집니다). 켄 역시 시드의 "타락(매춘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영어의 prostitution 은 꼭 성매매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서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에 혐오감과 실망을 느꼈지만, 재능 있는 뮤지션의 활로를 잔인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막아버리는 카슨의 방식에는 격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R. 예이츠는, 이제 모파상, 체홉의 계승자가 더 이상 유럽 대륙이 아닌 북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타가 공인하게 만든 거장입니다. 작가로서 이처럼 다양한 시선과 소재를 통해, 도시인의 고독과 페이소스를 참신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형상화한 예가 드뭅니다. 우리가 단편에서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그는 선배들이 이뤄 놓은 그 모든 장점은 장점대로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천재성은 그것대로 뽐내고 있습니다. 그 "뽐냄"은 그러나 R. 예이츠 자신, 그리고 우리 도시인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사제 없는 고해성사이며 정직한 제 영혼과의 직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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