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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공중 호텔 ㅣ 텔레포터
정화영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3월
평점 :
공중에 떠 유유히 하늘을 유람하는 호텔. 보통 공중OO이라고 하면 바빌론의 공중 정원처럼 그저 높은 고도에 불가사의하게 위치를 잡았다는 뜻인데요. 이 소설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런 놀라운 기술이 구현되어,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람선 퀸엘리자베스처럼 돈 많은 이들, 혹은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인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19세기 SF 소설가 쥘 베른의 <바다 밑 20만리>에 나오는 고독한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호도 연상되는데, 사실 "비밀의 공중 호텔"의 컨셉에 더 가까운 건 저 개인적으로는 60년 전 영화 007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rvice)>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억지이지만, 굳이 그런 걸 찾자면 말이죠). 고액을 지불하면 특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 시설 측의 공식 안내를 보자면 더욱 그런 느낌이 깊게 들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KD의 원작과 폴 버호벤의 영화판이 공히 주제로 삼는 바는, 진정한 삶의 흔적이 정직히 녹아든 기억이 온전해야 그게 인간이지, 인위적으로 조작 가공된 환상에 집착한다면 그건 당장이라도 죽어 없어져 마땅한 쓰레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람은 80년 가까운 생 동안 별의별 시련, 좌절, 상처를 다 만나게 마련이며 그 결과로 아픈 기억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갖고서 삽니다. 이걸 스스로의 인격 도야와 수양으로 성숙하게 극복을 해 내야지, 만만해 보이는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미친 모노드라마(아무도 안 봐 주는)를 제 혼자 공연하려 든다면 그건 스스로의 상처를 치명적으로 덧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 주변의 온갖 미친 사람들(늙으나 젊으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호텔 벨보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왓쳐(p33)라 불립니다. 그냥 번호로만 인식되고 처우되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그들 스스로 말합니다. 1인칭 주인공 차석준은 이 지극히 낯선 환경에 당황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본연의 목적을 이루려 애씁니다. p41에서 석준은 충격적인 진단을 마스터한(p148에서 드디어 그 본색이 나오는!)으로부터 듣습니다. "기억이 파편화되었네요." 이 진단을 석준은 기억의 그림자화로 해석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알아." 같은 말을 흔히 듣기도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자신이 가진 문제점은 자신이 잘 압니다. 석준이 바로 "그림자"라는 보조개념을 입에 올리는 대목에서 그가 여태 얼마나 스스로의 상처를 힘겹게 보듬었을지 짐작되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토탈 리콜>에도 리트리벌 큐(p41, p64)에 해당하는 게 나왔죠.
일란성 쌍둥이는 출생 시각이 미세하게만 차이나는 게 보통이라서 sibling rivalry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심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송예지와 언니 송예빈(p96)은 어떠했을까요? 아직 엄마는 언니 예지가 죽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안타까운 모습인데, 이럴수록 살아남은 자매 한쪽은 그만큼 깊은 상처와 강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십시오. 마스터의 권유에 따라 트라우마를 인위적으로 삭제하라는 처방을 받았으나 예지 엄마의 기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과거 식모로 살았는지 첩으로 취급받았는지 귀부인으로 놓았는지 전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늙은 폐인이 되어 버린 인생도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그에 반해, 소설 속의 예지는 나이에 비해 참 의젓합니다. "기억을 지워 버리면 떠난 사람에게 미안하잖아." 사람은 무릇 이래야 어른이고, 온전한 인격체입니다. 망각과 자기기만은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상처는 스스로 극복해 내어야 합니다.
p126에 충격적인 진실이 또 드러납니다.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다 여기 감금되었던 거야?" 구태여 미셸 푸코의 철학 이론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감금과 처벌, 인간소외와 폭력은 결코 따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p154에서 하이힐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등장하여 석준의 간절한 그리움이 드디어 채워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 엄마의 얼굴이 아빠와 똑같을까요?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아, 사람의 기억이란, 참 기만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아포리아로부터의 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p160 이하에서 드러나는 진상은 더욱 충격인데, 작가의 상상력에 정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