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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인사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5년 2월
평점 :
중견작가 함정임 선생의 이 신작을 보고 막연히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이란 장편이 생각났었습니다. 2021년 7월 그 작품은 영국의 대거(Dagger) 상도 받았더랬는데, 대략 11년 전인 2013년 11월에 제가 쓴 리뷰도 있습니다. 당시 퇴근길에 허겁지겁 귀가하여 간신히 서평 데드라인을 맞췄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신작 뒤표지에 윤고은 작가의 추천사도 있어서 더 흥미를 갖고,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게도 되었습니다. 물론 제목에 "밤"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점 말고는 형식적인 공통점이 거의 없으나, 아무튼 개인적 기억에 더 힘입어 몰입감 있는 독서를 하게도 되었네요.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10년 전인 2015년 1월,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인해 프랑스의 만평가인 엡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분개한 프랑스와 전세계의 시민들이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를 외치며 불관용과 폭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전개했었는데, p30에 "하나의 현상이 되어 버렸다"며 그 일이 언급됩니다. 허핑턴포스트는 한국에서도 나오고 그 훨씬 전부터 프랑스에서도 나왔는데, 그걸 "허핑턴프랑스"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아킴 롱생(Joachim Roncin)이라는 분(p15 등)이 그 창안자("창시자". créateur. p31)라고 당시에 말들 했었는데 이 소설에도 언급이 됩니다. 미나는 저 창시자라는 말이 눈에 띈다고 하는데 독자인 저는 본문 중에 악상(accent)까지 정확히 박은 섬세함이 눈에 띄었습니다. p84를 보면 장(Jean)이, 삼성, 엘지 등 한국 기업 이름을 말할 때 액센트까지 넣는다는 미나의 말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글자를 잘못 읽고 파리-n으로 봤는데 다시 정확히 보니 파라-n(p17)이었습니다. 요즘 이런저런 독서모임이 많은데 이 그룹은 독특하게도 "묵독(默讀)" 컨셉입니다. 한때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독서모임을 갖는 이유는 성원들 간의 대화, 유쾌하고 고양된 감정이 깃든 소리로 채우는 게 주된 목적 중 하나인데, 침묵으로 오롯이 텍스트에 집중한다니 뭔가 특이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이 분위기에 살짝 생경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phantasmagoria는 침묵 중에 더 잘 구현되지 않겠습니까.
미나가 윤중과 카톡을 주고받는 동안 장은 느긋하게 속도를 밟으며 파리 교외 국도를 달립니다. 이대로 어디를 향할까. 리용, 마르세유, 니스만 해도 꽤 먼데 뭐 로마까지 달리자고? 장 다운 얼척없는 제안입니다. 장은 모스크바 체류 시절의 기억을 말합니다. 굼(Gum)이라는 백화점을 느닷 말하는데 키릴 문자로는 Гум이라고 쓰죠. 여기서도 또 발터 벤야민이 나오는데(p84) 독일인이면서도 영원한 국외자로 떠돌았던 그는 볼셰비키 혁명 9년 후인 1926년 이곳을 들러 마트료슈카를 구입합니다. 발터 벤야민과는 달리(?) 여전히 장은 굼의 파사쥬에 주목합니다. 장의 대사대로, 19세기 말도 아닌 공산혁명 직후에도 바로 폐쇄되지 않고 자본주의 허영의 상징(장이 이런 말까지 하진 않았습니다만)을 열심히 디스플레이한 이 백화점의 운명이 기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니스와 산레모는 그리 멀지 않은데 서울에서 가평까지의 직선거리보다 짧습니다. 그러나 산레모는 중세부터 제노바 공화국 소속이었고 근대 들어서는 피에몬테 왕국에 병합되었던 이탈리아 영토입니다. p110에서 언급되는 사랑의 아픔, 원제목은 책에도 나오듯이 Je suis malade인데 묘하게도 저 앞의 조아킴 롱생의 챈트하고도 어구가 일부 겹치네요. 미나는 저 노래에 대해 산레모 가요제 참가곡인 것처럼 말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세르주 라마(이분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가 이 노래로 산레모에 출전한 적은 없습니다. "조금만, 이대로.(p151)" 좁은 공간에서 장과 미나의 키스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영원히 지속될 듯한데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둘의 자유로운 영혼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밤의 진실을 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