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눈물
이동환 지음 / 한솜미디어(띠앗)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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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닌 육신이란 필연적으로 정념의 발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종족 번식의 욕구는, 개체에게 좀 유발나다 할 성욕의 기제까지를 독자적으로 진화시켰는데, 이 때문에 어리석은 인간은 그 본연의 쓰임을 잊고 성욕 자체의 만족에만 몰두하다 파멸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인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가정이란 제도적 장치를 고안하여, 한창 나이의 암컷과 수컷이 그저 무작위로 문란한 말초적 욕구에만 빠져들어 타락하는 결과를 방지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의도가 정말 그쪽이었다면, 남과 여에 의무와 책임이 깃든 가시버시의 연분을 맺어 주는 이러한 공동체의 개입과 배려야말로 사람 사는 누리에 참다운 질서와 보람을 부여한 대성공이라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옆지기를 챙기고 보살피며, 그 과정에서 사랑의 결실로 얻은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어른이 됩니다. "남성과 여성은 결코 서로 투쟁하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상처 입지 않게 감싸안아야 할 관계인데, 어느 하나가 땅이고 하늘 행세를 하라니 그처럼 어이없는 규범과 폐습이 어디 또 있겠는가."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해서, 개인의 눈을 어둡게 가리고 선한 본성의 만개를 막던 모든 장애를 삽시간에 썩은 문짝처럼 걷어치웁니다. 그래서 일개 철없는 수컷을 어엿한 성인으로 거듭나게 깨우치는 스승은 공자, 예수, 부처님보다 오히려 그의 평범한(평범해서 위대한) 배우자입니다. 눈물 나도록 절절한 사랑으로 사람을 다시 빚고, 홈빡 통회의 눈물을 쏟아 육신과 마음의 모든 노폐물을 배출하는 정화의 의식을 차르게 하는 건 바로 아내의 존재입니다. 남편은 현명하고 사랑 가득한 아내를 통해 궁극의 진리를 깨닫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마침내 우주와 합일합니다. 부부 간의 사랑은 그 궁극의 경지가 곧 득도에 다름 없습니다. 가정은 이 순간 작은 우주로 완결성과 도덕성까지를 갖춥니다.

주인공 방철만씨는 남북 분단의 상황이 초래한 남하 실향민 가정 출신입니다.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계시며, 일정 세대(노년층)가 공유하는 수도권 방언의 억양이 (젊은 세대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르게) 평안도 색채가 강하게 끼어드는 건 워낙에 위에서 많이들 내려오신 영향이 커서입니다. 그런 사정 정도야 알았으나, 이분들이 "사실상 고아"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토록 절박하고 처연하게 규정하는 줄은 전혀 몰랐네요. 유명한 분들이 많지만 구 새누리당 국회의원 중 비교적 진보 성향의 정치인 차명진씨,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 씨 등이 여러 대담 등에서 "삼팔따라지 출신"이라며 분단 현대사의 비극상을 개인사로 편입하는 비장하고도 안타까운 모습을 접하기는 했습니다. 아마 가수 이문세씨 역시 집안 어르신들이 실향민이신 줄 압니다.

비록 고향의 끈끈한 연은 살벌한 무장 대치 전선 저편에 버려 두고 왔지만, 이분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로죠.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 역시 모범생처럼 사회의 정코스를 거치며 동요 없는 생의 경로를 걸어오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방철만씨 역시 그런 모범으로 꼽힐 만한 학생이었나 봅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주변이야 어찌 돌아가건 공부에만 전념하는 착실한 인성에다, 훤칠한 용모 덕분에 지나가던 여성이 한 번 정도는 다 쳐다보는 매력까지 갖춘 인재였습니다.

학생 운동에 캠퍼스 전체가 소용돌이쳤던 당시에도 대학생 방철만은 여대생들에게 아이돌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자기 주관도 확실한 터라 (세칭) 조건 좋은 여성들이 아무리 대시해 와도 자신의 눈에 안 차면 매너를 가장하여 점잖게 거절하는 일점의 가식조차 없는 정직한 영혼이었습니다. 부창부수라고 이런 방철만에게 첫눈에 반한 한지순 역시 (이름만큼이나) 순결, 순수한 여인이었고, 이런 한지순을 보고 방철만 역시 번거로운 "작업" 절차 일체를 생략하곤 고백과 교제로 돌입합니다. 책 중에도 언급되듯,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흔한 일회용 사랑(모텔로 직행)과는 매우 거리가 먼 순정형 패턴이라, 두 분이 낙원의 아담과 이브처럼 몸을 섞은 건 (그 당시 드물었을) 해외 신혼 여행을 가서도 한참 후였다고 합니다.

방철만씨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건, "원칙을 잊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오로지 검은 잇속으로만 뭉쳐 다니는 더러운 인맥 사회" 그 민낯의 목격이었습니다. 배고픈 시간 강사 경력도, 일정한 고난의 계단을 딛고 나면 보람을 찾아 주리라 기대했건만, 교수 자리 하나 주선에 일억을 대놓고 요구하는 경악스러운 부패 풍조에 격렬한 혐오감을 느끼고부터입니다. 영문과 대학원까지 마친 그의 실력으로야 어느 학교 교수 자리이건 따놓은 당상이었겠으나, 끼리끼리 이권을 놓고 구린 품앗이를 일삼는 썩은 풍조 속에서 그가 버텨낼 재간은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지조 높은 선비와도 같이 소신을 지키던 그는 처음으로 그간 그렇게 백안시하던 "사교육 분야"에 발을 들여 놓아, 인기 논술 강사로 오히려 보란 듯 성공하고 맙니다. 이에는 물론 학문적으로 탄탄한 그의 실력이 크게 작용했겠습니다만, 작품 중에서 누차 강조되듯 그의 훤칠한 외모도 무시 못할  팩터였겠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타고난 풍채가 좋아도 걸친 입성이 시원찮으면 쉽게 무시를 당하는 게 또한 (천박한) 우리네 풍조인데, 방철만 선생이 스타로 뜬 건 한지순 여사의 놀라운 코디 센스가 또 한몫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네요.

남편은 물론 그럴 만한 소신과 신조 때문에 불혹의 나이에 이르도록 세상과 타협 없이 절조를 지켜 온 겁니다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철없이" 선비의 길을 걸을 동안 혼자 가정을 꾸리며 온갖 고생을 도맡아해 왔습니다. 방철만씨처럼 많이 배우고, 남한테 내세울 만한 에고를 갖출 자격이 있는 분더러 그저 철이 덜 들었다, 아내를 공연히 고생시킨다 같은 흔한 비판을 할 수야 없겠지만(또, 그를 곤경에 몰아넣은 건 부조리한 사회 구조이지 개인의 부덕이 아닙니다), 방철만씨는 자신이 고고한 불타협 노선을 걸을 동안 그 뒷감당은 불쌍한 아내가 다 짊어졌음을 뒤늦게 각성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방철만 씨가 청년 시절 구상한 작품 중 낙원의 아담은 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위대함의 길을 제쳐 두고 하와와의 달콤한 사랑을 택했다고 합니다. 보통 아담 하면 간교한 뱀의 꾐에 넘어간 어리석은 여성을 계도하지 못하고 같이 우행을 저지른 원죄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방철만이 새로 의미를 부여한 아담은 당당히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적 사랑을 선택하고 고난의 길을 걸은 주체적 존재로 우뚝 섭니다. 이는 일시적 충동을 건사 못하고 처량하게 낙원에서 축출당한 부적격자의 방황이 아니라, 이후 후손들이 걸어야 할 길을 모범으로 보여 준, 고독하지만 행복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담이 자립하게 도운 건 물론 그 사랑의 원천이었던 하와였겠고 말입니다. 하와는 그저 욕정의 복락을 함께 누리는 파트너가 아니라, 신을 대신한 스승이요 제2의 모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살보다 더 살 같고 내 뼈보다 더 뼈와 같은...' 이 구절 역시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비하적 여성관의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 육신보다 더 살갑고 사랑스러운 이성, 옆지기에 대한 아담의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들린 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새삼 들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앞에서 "진정한 사랑은 득도와도 같다"고 했지만, 늦게나마 부부 간의 참다운 애정(졸혼이나 뭐니 하는 천박한 일본의 풍습 규정, 유행어를 들여와 본고장에서보다 더 살뜰히 써먹는 일부에서는 정말 반성이 필요하죠) 그 진수를 깨달은 남편의 "법어"는, 이처럼 고작 지면을 통해 고백을 엿듣는 독자에게까지 그 그윽한 파장의 일단을 접하게 돕는군요.

내 귀한 딸자식 소중한 줄만 알았지, 그런 딸이 그 나름의 안목으로 척 골라 놓고 "동거'에 들어간 남의 집 아들내미 귀한 줄은 모르고 그 결합과 선택을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본 자신의 협량에 대해서도,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맞아 눈물로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직접 만나 보니 훤칠한 외모에 성정 바르신 양친의 사랑을 (역시) 듬뿍 받고 자라난 티가 완연한 청년이었는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딸의 마음에까지 상처를 줘 가며 반대했던 건가. 아집과 에고에 갇혔던 탓에, 누구 눈에도 분명했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과거의 철만 안 든 (완벽한) 철만. 그와 이처럼 진솔한 결별을 이룬 것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남편과 딸 자영만 걱정했던 아내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이 아둔한 그를 일깨운 덕택이었습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이들이 기쁨으로 마침내 곡식을 거두던 날". 어쩌면 인생이라는 길고 거대한 무대에서, 아련한 복선을 청년기의 철만에게 습작의 꼴로 심어(숨겨) 두고,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야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눈물을 통해 그 참맛(호손의 <큰바위 얼굴>처럼 아담이 곧 철만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한 섭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욕망에 달뜨고 에고에 갇혀 주변의 소중한 이들이 내게 베푸는 사랑을 그저 당연한 권리인 양 찾아먹을 줄만 알았던 이 땅의 모든 남성들이 어머니와 여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보다 이른 시점에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와의 희생과 아담의 눈물은 원죄 아닌 공통의 교훈으로 모두의 가슴에 소중히 뿌리내리고 찬란한 꽃을 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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