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부국강병, 변법, 혁명의 파노라마
신동준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중국 근대사의 거인 증국번의 생을 다룬 도서를 읽었습니다만 이 격동기를 산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한 권에 묶어 소개한 책이 혹시 없을까 해서 찾아보니 마침 신동준 박사님이 쓴 대중서가 한 권 보이더군요. 책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다뤄졌는데,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얽혀들거나 치열하게 대립한 국면도 선명하기 때문에 책 한 권에 과연 다 커버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새삼 책 표지로 돌아가 보니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가 제목입니다. 이 시기는 과연 "인물들의 삶"이 역사 전체로 그대로 수놓아지고 전사, 마이그레이션된 시기가 아닐까, 인물로 읽어야 제대로 읽혀지는 시기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상인들의 파렴치한 물품을 모아 소각한, 강직한 청백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세를 생각 않고 무모한 결단,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아 소탐대실하는 "그릇 작은 원칙주의자"를 비판도 하는데, 임칙서는 오히려 저 사건 때문에 그 원대한 비전과 현명한 통찰력, 박학다식하고 유연한 지성, 인품이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책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 후, 피치 못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며, 참으로 매력적인 그의 자질과 개성에 대해 논급합니다. 만주족이 퇴조하고 한족 정통 지식인이 부상한 건 그의 현명한 처신이 유발한 결과였습니다. 구한말 이 땅에도 큰 반향을 부른 <해국도지>의 저자 위원도 그의 후배이며, 공양학의 태두 캉유웨이의 제자입니다.

증국번은 며칠 전 리뷰(와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주제 인물이고요. 신동준 저자께서는 오늘날 공사("회사"의 중국어)의 형태가, 이 증국번의 관독상판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증국번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에 대해서는 감탄하나, 물경 백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런 반관반민 형태가 지배적인 중국의 신뢰 부재, 자율성 결여의 풍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증국번이 엄청난 지주 가문에서 나고 성장한 것과 달리, 좌종당은 아주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 서세동점에 대항해 유일하게 국위 선양에 성공한 게 이 좌종당의 군사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죠. 야쿱 벡의 위구르 배후에는 특히 러시아가 도사렸는데, 여튼 이런 간접 대결에서 청이 국가 해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토의 판도가 유지되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좌종당과 일합을 겨룬 야쿱 벡이 보다 유연한 자세로 동족 피지배층(동 투르키스탄 인들)을 대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단합을 이뤄, 오늘날처럼 핍박 받는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과분의 위기라는 건 마치 오이가 나눠지듯 땅이 쪼개져 나라가 망하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풍자 카툰이 있는데 아래 이미지를 참조하십시오.


이홍장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세계관을 가졌고, 위안스카이 등을 부리며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간섭한 자입니다만, 여튼 중국의 위인은 일단 그의 고국인 중국의 이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죠. 저자께서는 "99년 조차" 조항을 두고 언젠가는 후손들이 땅을 찾으리라는 원대한 숙고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십니다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영국이 한심한 국위 쇠퇴를 겪지 않았다면, 또 야무진 등소평이 일처리를 그리 해내지 않았다면, 99년은 그저 현상으로 굳어 영원히 외국에 귀속되었을 겁니다. 또, 이홍장이 설령 영구 할양을 싸인해 줬다 해도, 힘을 갖춘 중국이 그걸 묵과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조약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건 제국주의 시절에나 효력을 지니는 불평등조약"이라며 깡그리 무시합니다. 이홍장이 뭘 생각했건 그 은덕을 입어서 오늘의 재귀속이 이뤄진 건 전혀 아닙니다.

캉유웨이는 공양학파의 태두이며, <춘추공양전>에의 깊은 천착을 통해 중국형 부강론을 제기한 석학입니다. 논자에 따라선 출세지향적 언동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서제는 그와 연합하여 서태후와 맞서려 했으나, 황제나 재상 모두 이 노회한 여걸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의 기량들이었죠. 캉유웨이는 조선에서도 그의 문명이 크게 알려진 정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당대의 명사였으나, 역시 한계도 뚜렷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캉유웨이의 제자(대략 17년 정도 나이 차가 나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스승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현실 참여나 경세의 수단도 더 노련했고요. 요즘 한국의 특정 정당 몇 군데에서 "자강론"이 자주 나오는데, 자강불식의 도그마를 당대에 크게 퍼뜨린 이가 바로 양계초입니다. 캉유웨이와 달리 민족주의 성향도 두드러졌죠. 그가 말하는 "다변"은 말 많다는 多辯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한 취지입니다.

손문은 위안 스카이보다 몇 살 아래인데, 어린 시절부터 연줄을 잘 잡아 마른자리만 골라 앉은 그와 평생의 숙적으로 대립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지만 어디까지나 미완의 혁명이었는데, 군벌 실력자 위안 스카이의 무력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허울뿐인 공화정은 끝내 무너지고 위안 스카이는 분별도 없이 황제정을 다시 부활하는데(이른바 복벽), 마치 후한말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 원술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성씨도 같고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생전에 뭔가 성취를 못 보고 다 실패로 끝난 도전들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학문적 각성이나 집안 배경도 부족하며 뭔가 인성도 덜 갖춰진 듯한 마오가 결국 천하통일- 외세 배격을 이뤄냈는데, 이는 세계 정세가 그리 돌아가다 우연히 귀착된 지점이 아닐까 봅니다. 인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구조적 팩터 분석을 통해 인물을 재규정해야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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