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메이커 - 개정증보판
박희아 지음 / 미디어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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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풍의 세계적 위력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 어쩌면 산업 전 분야를 통틀어 현 시점에서 가장 막강한 크리에이티브를 뽐내는 섹터는 이런 대중음악 공연 섹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모두 여덟 분 "아이돌 메이커"들과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가장 경쟁도치열하고 폭발적인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분야인만큼 그 완성에 기여하는 분들의 정신 자세, 직업적 소명의식, 프로페셔널리즘, 개인적이기까지 한 애착 등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이 분야 종사하는 이들이라도 다 여기 인터뷰이들처럼 "목숨 걸고" 일에 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이, 남의 고민과 창의력을 착취하면서도 "난 꼰대 아냐. 페이는 준다고."처럼 지레 생색을 내는 뻔뻔스러운 사람, 일은 대충 하면서 잘 결과가 안 풀리면 남탓 환경탓이나 하는 인간 등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한심한 군상이 목격됩니다. 결국 살아남는 건 그런 불성실하고 무능한 이들이 아니라, 책에 실린 분들처럼 자기 일 소중한 줄 알고, 내가 작은 기여(작지도 않지만)를 베푼 이 퍼포먼스, 이 기획, 이 "아이들"이 다 내 작품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미션, 프로젝트에 임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날 때, 한국의 자본주의 전체 스케일도 더 효율화, 고도화, "윤리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일반 독자들은 간신히 "허 그런 분들이 무대 뒤에서 실질적인 창조주 노릇을 했구나." 같은 반응이 나올 만한, 성함이 낯설게 들리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혹은, <프로듀스 101> 방영 당시 TV 화면에도 잠시 모습이 나왔던 분도 계신데, 그 사실(책 중에서는 다소 기억하기 낯뜨겁다는 듯 언급됩니다)을 아는 이들이라면 "아 그분!"하고 바로 연상도 되겠습니다.

여튼 우리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들이지만, 인터뷰어 박희아님은 익히 잘 아는 분들이었다는 듯(그쪽 매체에서 오래 취재하셨으니 당연하기도 합니다만), 평소부터 그들의 동선과 경향에 깊이 공감하셨다는 등 자연스럽게, 또 핵심을 찌르는 질문들을 하셔서, 책의 내용과 기획 취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독자를 대신해서 궁금했던 걸 해소해 주시네요."라기보다, 아예 "이런 걸 궁금해했어야 옳았고, 독자의 미진한 인식을 선도적으로 깨우치는 질문들"이었다고나 해야 타당한 평가겠습니다.

또 이렇게 말을 하면 너무 어려운 책 아닌가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는데, 전혀 그렇지는 않습니다. 독자 중 오히려 나이 어린 연예인 지망생이라든가, 그저 아이돌 가수들을 좋아해 온 평범한 십대들이라면, 이 업계의 복잡한 생리라든가 다소 혼탁하기도 한 분위기, 일반 사회인(성인)으로서 이해가 잘 안될 법한 인사이드 스토리도, 오히려 바로 그 본질이 피부에 와 닿을 만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도 됩니다. 그런 어린 독자들에게라면 미리 "이 바닥"의 뜨겁고 다이내믹하고 한편으로 추접스럽고 개탄스럽기도 한 사정에 대해, 미리 면역력까지도 길러 주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겠으며, 일반 성인 독자에게라면 세상에 이처럼 치열하게 사는 분들도 있구나, 뻔하게 남들 하던 루틴에만 묻어가며 남들 받는 건 다 챙기고 싶어했던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에 대해서도 정신이 화들짝 들 만큼 좋은 각성의 소재가 될 것 같네요.

"밖에서 만난 엄마(p22, p63 등)". 어떤 멘토라든가, 스승이라든가, 조력자 같은 개념에 비해, 이 말은 "아이돌 메이커"들이 해당 업계에서 아직 어린 연예인(혹은 후보자)에게 어떤 위상인지를 정말 잘 요약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출팸 같은 걸 떠올리지는 맙시다. 그건 그럴 걸 대뜸 연상하는 이의 영혼이 찌들었다는 뜻) 이 말씀은 보컬트레이너 기성은 님의 멋진 한 줄 요약인데, 비단 보컬트레이너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모든 인터뷰이, 성실한 종사자분들에게 두루 해당될 것 같습니다. 정작 낳아준 엄마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기 자식들"을 훈육하거나 침착하게 잘못을 교정하기 힘들지만, 이들 "가르치는 엄마"들은 직업상, 공적인 일에서의 과업까지 효율적으로 해 내야 합니다(물론 성별이 남성인 분들은 아빠가 되는 거겠고요). 일만 상대하면 되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인간들과 소중히 교감하는 직종이니 더하죠. (기획사) 사장님들도 "내 새끼"라는 표현 속에, 자신이 가꿔 나가는 연예인 자원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묻어내는 걸 보기도 합니다.

보컬 트레이너는 특히 아이돌 상대로 한 훈련에서, "잘되면 좋고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직종이라고도 합니다. 이 인터뷰 중에는 "예전(이라고하면 문맥상 1990년대 중반 이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읽었네요)에 얼마나 우수한 자원이 많았나. 그들도 요즘처럼 좋은 환경에서 케어받았다면 훨씬 오래가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같은 말이 나옵니다. 실제로 <복면가왕> 같은 걸 보면 무시로 아이돌들이 나와 깜짝 놀랄 만한 가창력을 뽐내고, 예전에 주현미씨도 "가수도 진화하는구나" 하며 놀라워한 적이 있죠.

한편으로, 어떤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있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단시일 안에 연예인의 체계적 양성을 위한 놀라운 민간 환경에 구축되었는지도 그러 놀라울 뿐입니다. 이에는 일단 상품 소비를 위한 거대한 시장이 생겼기에(국내, 해외), 그 수요에 부응한 창의적인 공급자가 대거 출현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으로는 소위 3대 거대 기획사가 과점 비슷한 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틈새 시장을 노려 열심히 "자기 아이들"을 다듬고 가꿔 팬들에게 어필시킨 중소 규모 사장님들의 패기가 대단했다고 봅니다. 저 같으면 3대 메이저가 버티고 있다는 그 여건에서부터 벌써 질려버려, "어차피 경쟁도 안 되는 것" 하며 지레 포기했지 싶습니다. 물론, 이처럼이나 비옥한 환경이 조성되게 한 일등 공신이라면, 이 책에 실린 "아이돌 메이커"들의 보이지 않는 기여, 열정, 그리고 재능이겠지요.

"가수를 가르치는 직업인데 가수보다 못해선 안 되는데...." 아티스트로서의 리스펙트를 원하는 만큼 못 받고 지나친 것도 아쉽지만, 이처럼 보컬 트레이너로서도 사회적 인정이 그저 맹숭맹숭하다는 건 더군다나 그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 보컬 트레이너뿐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이들의 직종에 대해 일반인, 혹은 관심 있는 인접 분야 종사자, 심지어 학부형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게, "생계가 넉넉히 유지되며 합당한 보수를 받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인터뷰이 여덟 분 중 누구도, 그리 자신 있는 대답을 안 하시네요. 물론 당사자들이야 최고니까 동종 종사자보다, 그리고 일반인보다 훨씬 윤택한 삶이 가능하겠지만, "이 직업에 종사하는 다른 이들, 평균은 어떤가"에 대해선 확답을 못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엔, 직업에 대한 관점이 아직 우리가 합당한 수정이 안 된 탓이 있지 않을까 봅니다. 이분들은 적성이나 재능으로나, 이것 아니면 다른 길이 없고 확 끌려서 이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 생계 방편으로 남들 하는 수준만 따라서 무덤덤한 직업의 일종으로 이 길을 고르려는 이들이라면, 전혀 못 버텨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크리에이티브와 열정으로 대비해야 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앞으로 모든 직업이 그리 될 것이고 말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 있게 본 분은 안무가 이솔미씨 대담 파트였습니다. 연예계 종사자라곤 해도 그 하시는 일, 걸어온 역정마다 일일이 다른 색채를 반영이라도 하듯, 어쩜 저렇게 외모들이 첨예한 개성을 뽐내는지 신기하기도 했는데, 이 이솔미씨는 말씀하시는 내용도 그렇고, 하, 이렇게 생기신 분도 있구나, 같은 느낌이 머리 속에 떠나질 않았습니다. 본인 대답 중에 나왔듯 키는 별로 안 크시다고 하는데, 사람이란 정말 고유의 철학, 경험, 사유로 어필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외모 속에 그 많은 부분이 압축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싶더군요.

"헤어, 의상, 다 챙겨주고 맨마지막으로 지급되는 게 안무다." 거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안무의 창의력이 아니라 공연의 성패는 그저 아이돌들이 가진 기본 기량, 비주얼, 스타일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겠지요? 실제로 과거 같으면 예컨대 보이밴드다 했을 때 안무가 별 차별화가 안 되기도 했습니다(뿐 아니라 스타일, 코디 등도 마찬가지). 이런 건 그야말로 1세대 아이돌들을 막 부릴 이십 년 전의 풍조이죠. 하부 섹터는 창의력으로 혁신을 거듭해가는데, 막상 윗분들(사장님, 임원진)의 인식이 1990년대식 그대로에 머물러 있으니 능력 있는 젊은 인력들이 아픔을 겪는 것이겠고요.

이분 인터뷰 중 가장 또 인상에 남는 게, 어느 "오빠"가 해 주셨다는 말(그분도 거물 아닐까요? 우리가 알만한 분이지 싶어 실명이 궁금합니다), "너희들은 왜 거울만 보고 춤을 추냐? 옆에서도, 심지어 뒤에서도 너희를 본다는 생각은 안해?" 이게 저는 참, 이솔미씨 본인 못지 않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일을 할 때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는 것, 남의 눈이 아니라 자기 만족으로 그저 대충 하고 마는 것, 저 "오빠"께서 해 주신 충고는, 비단 이 업종뿐 아니라 모든 직업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마음에 새기고 금언으로 삼아야 할 내용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돌은 대중 예술의 영감". 그런데 이제는 대중 예술 섹터 전체가, 타 산업의 영감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대중을 감동시키고, 열광하게 만들고, "나 요즘 쟤네들 보는 맛으로 산다"는 반응이 절로 나오게 하는 그런 창조적 마인드라야, 이제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교훈은 누가 작위적으로 지어낸 게 아니라, 이 책 8인의 인터뷰이처럼 자기 일에 미쳐 사는 이들(성장 환경도 참 다양합니다. 갑자기 가장의 건강 악화로 궁핍해진 분들, 미국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귀국한 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기에, 일반 독자들의 마음도 이처럼 각성시킬 수 있겠지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좋은 교과서 한 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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