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아탈리의 긍정 경제학 -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
자크 아탈리 외 지음, 권지현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긍정 경제"가 대체 뭘까요? 자계서에서 흔히 주장들 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라.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같은, 너무도 흔하고 뻔한 내용에 질린 독자들은 저 "긍정"이란 단어만 듣고도 지레 손사래를 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가 이 신저에서 대단히 체계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의도(무슨 뜻인지는 서평 후반에 설명하겠습니다)로 전개한 맥락에서의 "긍정" 혹은 '긍정 경제'는 그런 것들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띱니다. 첫째 담론의 초점이 개인을 넘어 최소 개별 국가(대개는 프랑스를 염두에 두었지만, 우리 한국에 직접 적용할 것들이 많습니다)를 염두에 두었으며, 둘째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에 바탕한 논의이며, 셋째 그러면서도 개인과 정부, 국제 단체가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프로젝트와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대석학들의 책에서 간혹 당혹스럽거나 때때로 짜증스럽게 다가오는 대목은, 고아하고 심오하지만 추상적인 어휘로 일관하여 결국은 읽는 이가 무엇을 당장 가까운 현실 속에서 행동에 옮길 지 감을 못 잡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도 그런 단점이 전혀 없지는 않고, 특히 국제 정세의 향방이라든가 패권의 소재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흔한 진술을 장식처럼 남기신 대목이 있긴 합니다. 추상적이라고 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소재와 대상, 글의 형식에 따라 낄 자리 안 낄 자리가 따로 있다는 이유에서지요. 이 책은 여전히 "긍정"의 개념이 이론적으로 명쾌히 제시되지는 못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대신 저자가 뭘 말하려 들었는지는 어떤 독자라도 납득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긍정 경제"에 대해 정치한 개념 제시를 했더라도, 논의의 방점이 "실천"에 놓인 이상 또다른 형이상과 추상의 장에 큰 정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긍정 경제"는 현존 개념 중 가장 가까운 것을 끌어대자면 "사회적 책임(사회학을 넘어 경영학 개념이죠)", "연대", "환경적 가치",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럼 새로운 게 없지 않은가. 제 생각으로는 1) 그 모든 기존의 지표를 더 큰 상위 개념에 묶은 것으로도 일단은 주목의 가치가 있고(앞으로 많은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의 지지를 얻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만) 2) 이른바 성장의 한계라든가, "제로 성장"을 전제로 한 모든 논의와 책 속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다는 게 분명한 특징입니다. 즉, 저자 자크 아탈리는 "앞으로도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며, 실제로 성장의 동력은 발견 중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크 아탈리의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은 "낙관"을 포함합니다. 이 책 서두에는 1972년 그 유명한 로마 클럽 보고서를 자주 거론하는데요. 이 책이 의도하지 않게 후세와 당대에 끼친 부정적(평범한 의도로 썼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좀 다르게 다가오네요) 영향이라면, 이제 인류의 번영과 성장은 그 한계에 다다랐으며, 그 미래는 암울하다는 쪽으로 잘못 선입견을 새겨 두었다는 겁니다(저자에 따르자면). 해당 보고서는 지금의 추세로 자원을 소비하면 가까운 미래에 남아날 것이 없다"는 경고였지, 인류가 이대로 아포칼립스를 맞으리라는 불길한 예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만약 해당 로마 클럽 보고서를 그렇게 새긴다면, 이 책 역시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부정 경제, 부정 미래"를 예고하는 이상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가 정반대편에 있음도 명백하고 말이죠.

"긍정"은 그런 의미에서 조건부 긍정이고 조건부 낙관입니다. 인류는 번영을 계속해야 하고, 성장 역시 (이 책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제안되는 것처럼)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쪽입니다. 다만 저자가 전제로 삼는 바는 "개인적, 소모적 탐욕, 제로섬 게임 전제의 모든 룰을 타파"하고 나서야 이 모든 긍정적 낙관적 전망이 가능하다는 거죠. 저자의 주장이 추상적이고 공허한 도덕 담론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건, 이 책에서 인용하거나 근거를 둔 방대한 사례와 통계 자료 덕분입니다.

저자는 "예언, 예측"을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중요한데요) 이미 세계 경제 각 섹터에서 현저히 그 조짐이 드러나는 중인 "긍정 경제의 씨앗"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일방적인 기대가 아니라, 이미 "긍정 경제"는 생존의 바른 길을 찾으려는 종(種)의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시행 착오를 통해 바른 길을 언제나 발견하며(못하면 멸종이죠), 8년 전 서브프라임 위기 당시 조급한 이익 회수 욕구, 원칙을 벗어난 투기 붐 과열로 뜨거운 맛을 본 인류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최소한 그 일부는요) 이 방법이 안 통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각성했다는 거죠. 이 역시 어떤 도덕적 각성, 윤리적 성숙이라기보다(물론 그런 면도 당연히 있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런 각성(각자도생보다는 협력이 살 길이다)을 일깨운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부터 협업과 팀웍을 통해 진화의 승리자가 된 종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저자는 그전부터 과도한 유동성의 폭주가 결국 경제의 탐욕과 불건강성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리버럴 스탠스의 케인지언들과도 일정 선을 그어 온 학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통화주의자들(이 책에도 밀턴 프리드먼의 재미있는 인용구가 나와 보면서 웃었습니다만)과의 세계관과는 (당연히)정면으로 대치한다는 건 또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 년을 버틴 금융기관이 어떻게 단 몇 년 만에 무너지는가? 사실 책에는 안 나와도 이는 지난번 봇물이 터지기 전에도 이미 1995년 베어링스 도산 사태때 예고되었던 바입니다(그거 한 번 언급하셨으면 좋았을 건데). 규제를 푸니 당장 돈이 몰려들어 좋긴 한데, 분별없는 직원이나 클라이언트들이 재미를 들여 한 발 한 발 선을 넘다 대형사고를 친 거죠. 이제 배울 만큼 쓰디쓴 교훈을 충분히 배운 사람들이, 자신도 파괴하고 남도 못살게 만드는 미친 레이스를 중단하고, 합리적 협업과 연대의식으로 전략의 새판을 짤 때가 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역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처음에서 인용하는) 애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비유와 도그마가 시공을 넘어 접합점을 다시 찾습니다. 저자의 의도는 "나 역시 스미스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쪽입니다.

저자의 의도에는 다분히, 종래의 살인적 경쟁이 "긍정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정이 깔려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돈 좀 벌겠다는데 나무 좀 자르면 어떻냐, 강물에 폐수를 풀면 어떻냐, 온실 효과 근거 없는 소리 아니냐, 애들이나 부녀자들 공장에서 착취한다 한들 시장 원리가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이런 마인드가 결국은 기업주 자신의 양심도 침해하며, 기업주 개인의 후손들이 여전히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지구를 망친다는 점에서 자해 행위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자계서와는 달리) 그런 약탈적 자본주의가 긍정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압권은 제6장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레닌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 아니라도, 저자는 독자들의 갈증을 선제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 무려 45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이 중 일부라도 각국 정부와 국제 단체가 실천에 옮겨 보라는 것이며, 자신 역시 선구자들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아 정리한다고 합니다. 석학의 책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형식과 편제이며, 우리 독자도 개인 차원에서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 청원하거나, 일상에서 작은 실천에 옮길 만한 것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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