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그랜트도 모르면서
루시 사이크스.조 피아자 지음, 이수영 옮김 / 나무옆의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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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종이 잡지, <타임>이라든가 <뉴스위크>, <피플> 같은 고퀄의 천연색 사진과 위엄 있는 텍스트가 쿨하게 배열되고 빼곡히 박힌 옛날식 미디어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텐데요. 인터넷 혁명은 그런 세대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일시에 앗아간 셈인데요. 잡지란, 신문이란, 책이란 여전히 페이퍼 포맷이라야지 "앱"이 다 뭔지 하는 느낌은 정신적 활동상이 막 피크에 이르던 세대가 겪은 상실감이라야 그 대표할 자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내가 아닌 듯 공황장애도 겪고 때론 그 역시 내 몸의 일부였을 종양 때문에 죽을 고비도 넘기기도 하는 법인데, 특정 세대에게는 그 흔치 않은 액운 때문에 잠시 맞은 휴지기조차 자신의 커리어에 중대 공백을 초래할 어떤 단절로 다가오는가 봅니다. 그것이 사회적 지위이든, 재산이든, 명예감정이든 간에 무엇을 손에 넣었다 상실하는 아픈 느낌은 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에게 큰 상처로 남습니다. 음... 특히, 인생의 매 순간을 뿌듯한 성취로 채우며 살아 왔고,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확실한 인정까지 받으며 성과 가득한 사회생활을 해 온 이에게는 더욱 큰 타격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능력"의 감퇴는 그리 한순간에 급격히 이뤄지는 게 아니고, 육체적 매력과는 달리 정신적 수월성은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져!"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일시적 위기를 맞더라도 그 극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닙니다. 그(혹은 그녀)는 이런 존재의 위기를 극복해 낼 가능성이 여전히 더 높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잘 해 왔던 터입니다.

하지만 이런 직위와 평판의 위기가 개인의 노력이나 자질 문제가 아닌, 문화적, 시대적 흐름의 거대한 변화에 기인했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어." 만약 노하우나 지식의 문제라면 그(혹은 그녀)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기존에 쌓아올린 정신적 자산에 잘 통합시키면 됩니다. 오히려 예전의 내력까지 다 갖춘 정신이, 새로운 정보까지 더 깊은 맥락에서 소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치프" 이머진 테이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육 개월을 항암 투병하느라 쉬고 온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녀의 능력과 센스는 종이 위에 깨끗이 인쇄된 잡지라는 판형을 전제로 하여 천재처럼 달인처럼 발휘되어 왔었지요. 지금은? 형체도 없고 무슨 과정으로 생성되어 스마트폰 안에 파고들었는지도 모를 "앱"이 그 화려한(화려했던) 전달자를 대신해 버렸습니다. 그 반 년이라는 잠시 동안에 말입니다. 그녀가 위엄 있게 자신의 의자에 앉아 완성본의 페이지를 넘기며 아랫사람들에게 지적할 건 지적하고 자신의 능란한 솜씨를 나르시스적으로 감탄하던 그 매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일부도 어디론가 가 버린 것입니다. 자긍과, 영감의 원천과, 삶의 목표까지도.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건 모두 지난 시대의 산물이야. 당신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고, 어찌어찌 몇 걸음은 남들처럼 따라갈 수 있겠지만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지. 그래봤자 그 몇 걸음뿐인데, 남은 여정은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나?" 반대로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나이 든 세대에게 무척이나 낯설고 일일이 감정선을 추스려 대응해야 하는 게, 그들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당연한 환경이고 즐길 수 있는 여건일 뿐입니다. 노력하는 사람(힘까지 부치는)이 즐기는 사람(정력까지 팔팔한)을 못 따라가는 건 너무도 당연하죠. "퇴물"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겁니다. 지식은 배우면 되지만, 센스나 감성은 시대가 바뀌면 통째로 바꾸기에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감정선의 집합은 곧 그 사람 인격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한번 공들여 내면에 쌓아 놓은 감정의 그 무수한 연결고리들을 어떻게 일일이 손 대겠습니까. 이제 이머진의 상사와 부하들은, "당신의 센스가 낡았으니 당신 자체가 필요없다"고 암암리에 측은한 눈길과 함께 명예로운 퇴장을 권하는 겁니다.

이 소설의 원제는 knockoff, 확신도 없고 감각도 못 느끼면서 어설프게 남들 따라하며 인정은 받고 싶어하는 3류를 말합니다. 3류로 살아온 인생에게는 어찌어찌 하루를 연명하기만 해도 뿌듯할 수 있지만, 이머진 테이트처럼 모든 업무를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센스와 확신으로 처리해 온 이에게는 그런 3류, knockoff 신세로 질질 끌려간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자 사형선고였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시대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감성을 슬슬 타협해 가며, 별 승산 없어 보이는 적응을 시도하겠습니까, 아니면 "이건 나만의 센스, 나만의 해석이야!"를 부르짖으며 대세와의 정면 승부를 선택하겠습니까?

이머진 테이트를 괴롭히는 문제는 사실 이런 "밑에서 치고올라오는 미래"의 이슈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예전에 우습게 본 동료나 라이벌들이, 그녀가 잠시 휴지기를 갖던 그새 상황의 요행 덕인지 채 보지 못하고 지나친 어떤 필연의 지원 덕인지 레이스에서 자신을 앞지르며 그녀의 자존을 다른 방향에서 상처 주는 일까지 벌어지네요.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 그 나름 화려한 생을 살게 해 준 무대에서 퇴장하느냐, 그녀의 자존 대부분을 구성하는 감성과 집착과 애정하는 바들과 멋지게 재활에 성공하느냐, 이는 사실 우리 독자들이 바로 우리의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린 문제와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사사건건 그녀와 대립하는 이브이지만, 사실 이는 이머진이 주인공으로서 발휘하는 특권으로, 실상과 다르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도하는 왜곡인지도 모릅니다. 이브 역시 이머진처럼 그녀 나름의 필사적인 생존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하필 모든 감정선과 취향이 맞부딪는 이머진을 만나게 된 것일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독자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이머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녀가 받는 핍박이 우리의 것인양 일일이 동감하며 성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뿌듯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책을 덮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머진과 이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관전자의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본다면, 혹 직장에서 자신이 겪은 여러 문제들 역시 이처럼 해석과 판단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 거고요. 어느 쪽이든 이 요란하고 재미있고 치열한 사연은, 읽고 나기 전과 후의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 게 또 작가의 재능인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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