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 출애굽기 강해 아더 핑크 클래식 4
아더 핑크 지음, 지상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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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좇아 "아더"로 씀) 핑크의 생애와 저작을 읽으면 저는 언제나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올바르다고 믿는 원칙과 소신을 위해 구태여 주변과 마찰을 빚어가면서, 협소한 자아의 욕구와 만족이 아닌 "더 큰 이상"의 실현에 기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하는 것.  그 과정과 결과가 개인의 아집과 독선에 그치지 않았음은, 그가 교계에 남긴 신학적 업적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현재의 실태를 보면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듣기 좋은, 솔깃한 말만 골라 하는 건 특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 법이죠. 엘리야나 이사야, 나단 같은 이들도 대중에게 호응과 존경을 얻은 게, 감언이설과 공감을 빙자한 선동 따위를 통해서가 아닌, 진실과 실체를 향한 갈구와 선포가 그 비결이었음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typology는 비단 신학에서뿐 아니고(신학에서의 등장이 가장 시기적으로 먼저인 것도 아니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방법론, 혹은 유파로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진영"입니다(예를 들어 언어학에서는 유형론, 고고학에서는 형식론). 하지만 다른 학문 분야에서 발전한 방법론이 신학의 이 입장 태동과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모형론"은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만) 신학에서 꽤나 입지가 탄탄할 수밖에 없는 "태생"을 갖췄는데, 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신약 텍스트 중에서, 거의 직접적이라 할 만한 "모형론적 언급"을 수 차례 하고 있음("모형론"이란 용어 자체가 아니라)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뿐 아니라, (스승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이 당연한) 사도들도 여러 대목에서, 현대 용어로 "모형론적 태도"로 볼 수밖에 없는 깊숙한, 그리고 울림 깊은 발언을 어려 차례 행합니다. 만약 "모형론적 방법론"이 어떤 이유에서 송두리째 신학(중 주석학)으로부터 퇴장하는 일이 혹 생긴다면, 신학의 전 체계가 붕괴하리라는 예측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초기 유력 교부들 중 여럿은(비록 다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본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타나크")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했습니다. 이런 교부들의 태도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인 기준이라 해도) 아주 수긍이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중에 목사님이 되실) 신학생들 입에서 나오는 "성경(聖經)이 성경(性經)인가?" 같은 대화를 듣기도 했는데, 물론 경박한 표현인데다 그게 당사자들의 최종적 결론은 아닌 줄 알지만, 여튼 구약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미약한 인간의 지혜라서인지는 모르나) 상당히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구절들은, 설령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경전의 문면(文面)이 이런 형편이기에, 성경을 읽을 때(마르틴 루터 이래 평신도들 누구나 성경에 접할 수 있으며, 또 그게 의무의 일환입니다) "주석과 해석"이 없으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고(깊은 신심과 영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또 그게 주석학자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에 주(註)를 다는 근대적 기법과 지혜는 역사적으로 다른 어떤 학문보다 먼저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 발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법학에서의 주석서(Kommentar. 영어의 commentary) 서술법이 있죠.

모형론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구약의 상당수 사건과 선언, 기술(記述), 증언은 신약의 교리와 계명을 본따서 이뤄진 것이란 전제에서 시작하는 해석 태도입니다. "모형"이라는 말 자체가(신학뿐 아니라 일상언어에서도), "모방해서 만든 꼴"이란 의미죠. 시간적으로 먼저 이뤄진 일들(과거)이, 어떻게 이후의 진행(미래)을 모방할 수 있느냐며 의문이 생기는 게 또한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는 신학의 방법론을 주제 삼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연대적 순서가 시대구분적 합리성에서 벗어난다"는 핑크의 다른 맥락 언명도 있습니다. p452:17). 앞서 언급한 대로, 무엇보다 신약의 복음서 등이, 구약의 이러이러한 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이러한 행적과 가르침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건의 발생을 "예언함"이었다는 식으로, 거의 직설적 서술을 행합니다.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 신도들은, 자신이 소박하게나마 이해한 대부분의 성경 해석론이 알고보면 "모형론이 그 전부나 마찬가지였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형론은, 기독교인이 성경을 받아들임에 있어 어느 정도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역시 아닙니다. 물론 그 무차별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크나큰 신중함, 자제가 필요하겠지만요.

"둘은 언제나 분리의 숫자이며, 셋은 언제나 현시(manifestation)의 숫자이다." 아더 핑크가 즐겨쓰는 문장인데, 최소한 전자를 위해 인용되는 예 중 different, diversion에서 di- 어근이 그런 의미임은 세속적, 언어과학적 맥락에서도 타당해서 재미있습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삼위일체에서의 3 역시 현시(顯示)로건 암시로건 묵시로건 간에, 이런 영원의 진리와 조우할 때 울림이 예사롭지 않은 숫자이죠. "삼 개월이 되던 날, ...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삼 개월이 아니라 삼 년, 삼십 년이 지나도 이 모세의 백성들이 얼마나 지도자, 구원자의 속을 썩이는지는 문제아가 그 부모의 속을 태우는 게 애교로 보일 만큼이죠.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인데, 여튼 신학적 문제에서 "과연 시내(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의 섭리시대가 시작(dispensation)되었다는 확증이 있는가?"라는 오랜 물음을 아더 핑크는 도전적으로 내어 놓습니다.

그는 특히 p286 중간쯤에서 "어느 평판 있는 주석자"의 문장을 길게 인용하고, 이를 놓고 신랄하다 할 만한 어조로 비판을 시작하는데, 이 27장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참고로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 "주석자"가 누군가 하면, 대략 아더 핑크의 시대보다 반 세기를 앞서 산 에드워드 데넷이라는 존경받는 학자, 성직자였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번역본, 혹은 영어 원문에도 명시적 언급이 없어서 정보 삼아 이 서평에 기록해 둡니다. 참고로 p468:10, p484:2 등에는 이 이름이 나오지만(이때에는 그 인용 주장이 핑크 자신의 의견과 같은 취지라 이름을 바로 밝힙니다), 데넷 말고도 다른 여러 주석자들(코츠, 라이다웃[이 번역서에서는 "리도우트"라고 쓰더군요], 솔타우. 크레인, 불링어, 브라이트)이 언급되는 터라,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줄 독자가 눈치채긴 힘들겠죠. 참고로 이 번역서는 소결(summary)을 편제상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제72장으로 다뤘고(다른 章과 동등한 지위로 봄), 원서나 번역서나 참고 문헌 목록이 없는데 이는 주석서의 성격, 편집상 이유입니다. 근엄하고 신실하기 짝이 없는 핑크의 문장과 어조에 다소 주눅이 들 수 있지만, 성경 구절의 진의가 항상 궁금했던 신도들(혹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가르침을 담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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