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열풍의 진앙지 일본 가와치 河內 일본에 남은 문화강국 백제의 발자취 1
양기석.노중국 외 지음 / 주류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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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고대사 그 바른 내역에 대해서는 워낙 기록이 불충분하게 남겨진 까닭에 누구라도 논쟁의 고비에 확언 정설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학자 모두가 열린 마음 공정한 자세로 겸손되이 진리를 탐구해 나가야 할 텐데요. 이런 학자적 양심을 기대하기에는, 근래 일본이 너무 막나가는 태도를 취하기에 뜻있는 이들의 우려가 매우 큽니다. 우리 겨레가 각별한 마음가짐으로 선조들의 노고와 유산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 빛나는 자취란 그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한류 열풍의 진앙지"라는 어구를 제목 일부에 쓰는데요. 완독한 후 이 표현이 책 내용을 정확히도 짚어내었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 말에서 "소녀시대나 카라의 활동상"이 혹시 오사카 일대에서 재조명되는 내용인가 잘못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대사, 특히 일본이 아직 야만과 무지몽매의 늪에서 채 못 벗어날 시절 우리 조상들에게 문화적으로 진 빚의 깊이와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었습니다. 한국의 연예인들이 열도에서 맹활약하는 모습도 물론 자랑스럽지만, 이 책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한 단면은 우리가 과연 이렇게 태만히, 덜 각성된 후손으로서 몰역사적 의식을 이어가도 되는 건지, 심각한 자기 반성을 촉구하더군요.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로는 불충분한, 근본에서부터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집니다.

일본 고대사는 구석기- 죠몬- 야요이 - 고훈 시대로 대개 구분됩니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시대가 저 중 마지막 단계인 고훈[古墳]기(期)이겠는데요. 거대한 무덤의 출현은 곧 계급 사회의 도래를 선포하는 상징이나 다름 없기에, 이 시대를 향한 분석은 일본 열도의 사회 구조가 어떤 심대한 변화를 맞이했는지 중요한 암시를 어떤 방면에서도 던져 줍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지배 - 피지배층이 본격 분화할 때, 문화적, 제도적, 의식적 면에서 적지 않은 공헌, 최소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 바로 "도래인"들이었습니다.



"도래인"들이라는 용어에 대해, 최근에는 이 말이 "일본 중심"의 시각을 전제로 한다는 지적이 있어 "도왜인"으로 바꿔 쓴다는 설명이 책에도 나옵니다. "왜"는 특정 시기, 그저 지역과 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뿐이니 어떤 비하의 의도는 없는 셈이죠. 이 책은 그래서 "텐노[天皇]"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당시 이르던 대로 "왜왕"으로 일관합니다. 이것이 올바르며, 당해 호칭이 쓰이지 않았을 때에까지 모두 소급 적용하는 저쪽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지요. 참고로 이 책은 "고훈[古墳]"에서처럼, 일본어 어휘의 보충 설명에서는 꺾은괄호를, 한국어 한자음 뒤의 병기에서는 일반 괄호를 씁니다. 행여 일본식 독음을 한국어의 그것과 같은 위상으로 둘 위험을 배제하려는 사려 깊은 표기법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시대로는 고훈 기, 지역적으로는 오사카 일대, 그 중에서도 가와치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의 활발했던 외교, 정치, 군사, 문화 업적상을 주목합니다. 지금까지 막연히 "조상"으로 칭해 왔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당연 삼국 중에서도 "백제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교근공의 논리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 또 그의 속국 비슷한 위상의 신라(일단 4세기 기준)를 견제하기 위해 바다 건너 왜의 군사력을 특히 탐냈는데요. 왜 역시 고구려의 강력한 위협, 인접 신라와의 잦은 분쟁 때문에 일단 군사역학 상으로도 협력이 시급했습니다.



먼저 접촉과 교린을 시도한 건 백제였는데, 이 때문에 지금도 일본인들은 얼토당토않게도 이를 "문화 노예" 정도로 왜곡, 비하하며, 상국의 위치에서 공물을 거두었다는 등의 낭설, 억측을 일삼죠. 하지만 백제는 영리하게도 인구가 많고 물산이 비교적 풍족했던 왜의 1차 자원을 이용하려 들었던 것뿐이며, 왜의 무력이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거나, 고구려, 신라 등과 파트너 체인징을 시도할 국면에는 지체 없이 교류를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사정이 급한 건 대개는 왜 측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훈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계급의 분화가 가속되었는데, 지배층으로서 하층민들을 향해 위신을 세우려면 세련된 문화의 향유를 과시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6세기부터는 열도에서도 불교 문화의 본격 도입이 이뤄졌는데, 왕실이 항구적으로 신민의 복속과 유연화를 이루려면 이런 고등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그 심리의 기층 저변을 통제할 필요가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백제 문화는 열도의 그것보다 외관, 성능, 미학적 가치, 심미적 만족 등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에, 심지어는 숙어적 표현으로 "쿠다라나이" 같은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산물이 아니면 질이 낮아 시시하다"는 뜻이 담긴 이 표현은, 열도의 지배층이 백제로부터의 문화적 세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왜왕은 살아서 백제 문화의 숭배자를 자처했고, 죽어서도 묘지를 그런 뜻에 맞게 조성한 후 묻히기를 바랄 정도였죠. 백제의 문화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람은 남 위에 설 자격이 더 갖추어졌다고 통념이 생겼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또한 불교는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그저 추상적인 신앙으로서 퍼진 게 아니라, 의식과 예배와 교리와 성직자가 혼연일체를 이루는 패턴이었죠. 이른바 삼보(三寶)는 불- 법 - 승을 가리키는데, 초기 백제는 이 불교 문화를 전해줄 때 승려의 파견은 누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두고 이 책에서는 "이미 널리 불교를 수용하려 든 현지(왜)의 실정을 감안"했다고도 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백제의 전략적 고려도 작용한 바 있겠음을 우리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죠. 아무튼 지금도 일본 국민의 40% 가량이 불교 신도임을 감안할 때, 고대 백제가 일본에 다져 준 문화의 기틀이 얼마나 아득한 역사를 갖는지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 특히 백제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은 이런 문화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인적인 교류가 직접 이뤄진 부분도 큽니다. 오사카, 특히 가와치 일대에 사는 현대의 일본인 상당수는, 그 조상을 실제로 한국계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유,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집단 이주를 일본에 도모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河內라 쓰고 가와치라 읽는 건 그 깊은 사연이 따로 있다는 거죠. 책은 특히 "고훈 시대",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들(지배층의 위신을 드러내기 위한)이 하나같이 백제 양식을 모방하여 조성된 그 추세에 주목하면서, 이런 물적, 인적인 "한류 열풍"이 얼마나 뿌리 깊고 항구적으로 일본 문화(그렇게 부를 만한 게 있기나 했다면)에 영향을 주었는지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유적과 문화재, 언어적 흔적들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그 실상을 왜곡하며 막무가내로 우겨대던 건 심지어 고대사의 한 국면에서도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송 황실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 왜국의 수장을 백제, 모한(=마한), 신라 등의 지배자로까지 책봉해 달라며 억지를 썼다는 거죠. 이런 주장은 당대인들, 혹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정치 단위 중 왜국인들 말고는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 망상이었습니다. 다만 한반도가 그들의 이런 방자한 태도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던 건 그저 무시해 버릴 만한 망동이어서이기도 하겠으나,근본적으로는 삼국이 분열했던 정치적 취약성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겁니다. 조상들의 찬란한 위업을 돌아보며, 우리 후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본분을 다하는 중인지, 진지한 역사의식의 각성과 분발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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