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은 죽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희재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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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미국은 그 출발은 미미하였으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군 거대한 제국 위에 발을 딛고 세계를 향해 호령하는 비즈니스의 타이쿤들을 실제로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Kane Bendigo 역시, 실존의 여러 사업가들을 요것조것 믹스한 듯 매력적인 실감을 풍기는 캐릭터입니다. 돈, 혹은 여타의 재산이란 장삼이사의 이런저런 초라한 손들에 흩어져 있으면 별 힘을 못 쓰는 법인데, 한 사람의 손 안에 움켜쥐어져 있으니 이처럼이나 놀라운 일들을 해 내는 군요.

케인 벤디고는 섬 하나를 소유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호위대와 소규모의 해군, 육군 등을 직접 거느리는 군주입니다. 나이도 아직 40을 넘기지 않아 보일 만큼 활력이 가득한 미남인데, 보통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이처럼 정신의 활력이 육체적 매력까지를 지탱해 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라고 일단은 해 두죠). 이 정도 부와 권력과 원대한 비전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군주라 불려 마땅하다... 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는 진짜로 미합중국 대통령(이라고 명시되진 않았으나 독자는 당연히 눈치챌 수 있죠)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에게 승인까지 받은, 진짜 국가 원수이자 주권자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불가능하며, 분별 있는 독자에게는 소설의 매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게 유감입니다. 모나코니 안도라니 하는 공국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아직까지 독립국가 신분을 유지하는 게 아니듯, 국제 관계란 힘만 있다고 바로 독립적 단위로 승인받을 수 없습니다.(하물며... 그러나 스포일러이니 언급 자제)

어쨌든 그렇다 치고, 퀸 부자는 이 나라에서 국내 살림을 도맡아하는 총리이자 케인 벤디고의 동생인 아벨 벤디고에게 특별히 초빙되어, 예의 섬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형이자 국가 원수이며 벤디고 제국의 창립자이자 세계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실제로 남미 여러 국가의 정권들이 이 사람의 입김으로 교체되었다는 설정입니다)을 발산하는 케인이, 누구에게로부터 지속적으로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정 때문입니다. 퀸 부자는 이런 장난(워낙 엄중한 경호를 받는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능 스포츠맨인 케인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으므로)을 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 줄 것을 의뢰받습니다. 막상 대면해 본 "킹" 케인 벤디고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았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 케인의 본명은 사실 카인이었답니다. 동생을 죽인 성경 속의 그 인물이죠." 표기상의 한계, 오해, 무신경 등이 결합하여 오히려 절묘한 분별 효과를 낸 셈인데, 영어 원문에는 케인=Kane, 카인=Cain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의 발음은 같습니다. 따라서, 발음이 아니라 철자를 봐야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한국어판에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고, 뭐 알 필요도 없긴 합니다). 이 한국어판을 보면 퀸 부자가 케인의 의상실을 수색하며 "지팡이는 없냐?"고 드립을 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cane(지팡이)를 염두에 둔 말장난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원서 대조는 안 해 봤으나 아마 맞을 듯).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요?" 헌데, 찾아 보면 의외로 많다(성공한 인물들 다수 포함)는 게 함정이고, 그 박식한 작가님도 이야기를 꾸며 내기 위해 좀 오버한 면이 있네요. 어느 분에 대해 육체적 특징을 장황히 언급한 것도 그에게 시선이 대뜸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한 속 보이는 장치였고(귀족 특유의 박탈감과 정의감의 발로였다는 심리적 장치도 곁들이시지 그랬나요), 어느 물리학 박사가 죽은 이유도 원자 폭탄 제조 회유를 거절해서라는 사연이 들어 있었어야 아귀가 맞는데 아마 떡밥 회수가 안 된 듯합니다.

멋진 마술이긴 한데 그 트릭을 알고 보면 애 입에서도 욕이 나오죠. 이 소설은 (퀸의 다른 작품처럼) 멋진 착시 효과를 통해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는 finesse를 자랑하지만, 사실 내실이 좀 부족합니다. 케인의 암살이 미수에 그쳤을 때, 퀸 부자가 계속 섬에 붙들려 있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이 이미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는데 독자가 뭘 궁금해해야 할지 좀 더 넉넉한 발판을 깔아 놓지 못한 건 마음에 안 듭니다(이것부터가 범인의 정체를 다 폭로하는 거나 마찬가지). 살인 미수의 진상은 너무도 빤히 드러납니다. 아무리 미숙한 독자라 해도 유다의 쌩쇼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고, 그 밀실 트릭의 경위 역시 조금만 머리를 쓰면 바로 눈치챌 수 있어서 별로 자랑할 마음도 안 생기네요. 밀실 트릭의 경위뿐 아니라, "왜 퀸 부자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바보 아닌 이상 다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필 3형제가 라이츠빌 출신이었다는 배경 설명도 우습고, 엘러리라면 구태여 고향에 갔다 올 필요도 없이 진상을 모두 파악했을 겁니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긴 하더군요. 시리즈 다른 작품을 바로 손에 잡고 읽을 마음이 생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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