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발랄하면서도 날카로운 논지 전개(그의 예리한 논리 동원 실력을 보면 의외로 이분 정통파구나 하는 평가가 나오죠)에만 익숙했던 나머지, 그가 우리 시대의 직면 과제에 대해 열심히 분석하고 던져 주는 실천적 해답에 정작 주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는 순수 이론가로서의 면모 외에, 이처럼 저널리즘적 스탠스를 진지하게 유지하는 논객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인문과학" 저술로보다는, "정책 제안" 기조로 간주하고 읽었습니다.

"죽은 경제학자"에게서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수 있음은 "그 고인"들이 진정 석학이요 현인이었던 까닭이지 우리 독자들이 딱히 현명하고 눈밝아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현재를 버젓이 사는 그 고명한 이론가, 교수님, 이데올로그들이 정작 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 놓는다면 그건 소명을 포기한 소이일 뿐 아니라, 망자, 고인에 부끄러운 처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진보된, 혹은 그저 최신이기만 해도 그 자체가 축복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시대의 질문에 답을 못 한다면 지식인이 못 됨 이전에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못함이나 같습니다. 지젝의 글은 그래서 읽기에 재밌을 뿐 아니라, 질문인지도 몰랐던 물음을 먼저 떠올려 주고 그에 대한 답(물론 모든 독자로부터 동의를 받을 내용은 아닙니다- 달리 "논쟁적인 지젝"이겠습니까?)까지, 창의적으로, 신랄하게, 그리고 명징한 틀에 담아 제시받는 그런 쾌감이 있습니다.


타자로서의 이슬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유럽은 현재 오랜 타자, 숙적, 이웃, 그리고 자아를 비춰 볼 거울인 이슬람과 전면적 접촉을 겪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오스만 제국의 침공, 서구 제국주의의 동점 등이 교차한 시기에도, 이 "타자"와의 접촉은 부분적이었을망정 전면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들과의 만남은, "대체, 오랜동안 반은 적대감으로 반은 낯섦으로 대해 온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 자문을 제기하는 국면입니다. 아래로부터는 난민을 만납니다. 권력의 심각한 진공기를 겪고 있는 그들의 영토로부터, 임시로 상층부를 지배하는 팩션으로부터는 "테러"를 선사받습니다. 한편으로 유럽인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새롭게 "자신과 타자"에 대한 각성의 눈을 뜨게 된 "셈 혈통의 시민권자, 혹은 불법 이민자"들과 다른 성격의 소통을 요구 받습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안에서, 밖에서, 사방에서 밀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에 유럽은 지금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지젝은 두 방면의 대처에 공히 눈을 돌립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혈 좌파인 그가 대뜸 내는 일성은 "배타적 우월주의"에 대한 맹렬한 경계입니다. 그가 예시하는 여러 지난 역사의 사건들은, 그의 애독자라면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게 부르지만, 역시 날카로운 그의 개성이 스민 논리 속에 여전한 "뜨끔함"을 낳습니다. 다음으로 관점(과 상상력)의 한계가 역력하나 인문학자의 성실함과 공평성을 견지해야 할 그는, "규제적 이념"의 장벽을 넘지 못할망정 열심히 무슬림의 내밀한 정신 영역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 일 것이다. 그들이라면 아마...라고 생각/선택할 것이다."

쉽게 요약해서 그가 내놓은 해법은 소박한 연대의 대안입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소속된 지근 거리의 집단, 혹은 초고위급 준거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언제나처럼 지젝 특유의 편한 해법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그 모든 전통, 개성, 장벽 따위는 (내면과의 정직한 대화만을 통해서도) 무의미해지는 그 놀라운 인식을 겪어 볼 것을 조언하는 식으로, 논의의 소결을 내립니다. 이 역시 서양 철학의 오랜 동안 생사를 걸고 논쟁해 온,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구체와 추상의 모순, 종개념과 유개념의 존재론적 길항 등이 그대로 환기됩니다.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이 먼저인가, 아니면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해야 하는 이스라엘 군인으로서의 의무가 먼저인가?" 지젝 역시 겸손하게 자신의 논변 한계를 털어 놓습니다. "어디까지가 일반화의 한계일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결론을 두부 자르듯 내 놓아서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활화산 같은 논쟁점을 즐거이 독자가 어질러 놓게 부추기는, 모범생 집에 놀러와 청솟거리만 잔뜩 만들어 놓고 가는 말썽쟁이 친구를 전송하는 느낌으로 책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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