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3 - 에이전트 6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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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데미도프만 극중에서 고생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도 안 될 만큼 다사다난한) 동선을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걱정, 안도, 불안, 분노, 좌절, 그리고 감동이 몰아닥치는 마음을 간수하느라 거의 초주검이 될 지경입니다. 희망고문을 당하는 건 소비에트 철권 체제로 송환된 레오가 아니라, 과연 이대로 철저한 부조리, 악덕, 기만, 음모가 승리한 채 극을 마무리짓고 말 것인지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핏발 선 눈을 추스려 가며 대치하는 독자입니다.

이 장편은 스릴러로서, 그리고 미스테리로서도 완결성을 갖추었지만 (도중에 이야기가 너무 스케일을 넓혀 나간다고 주의를 흩뜨리지 마십시오. 작가는 이렇게 대담한 서사를 펴 나가면서도 벌여 놓은 가닥은 모두 수습하는 매섭고 무서운 솜씨를 지녔습니다), 그 담은 테마는 마치 앙드레 말로 作  <인간 조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묵직하고 순도 높은 성격입니다. 멋진 장르 문학인데, 그리 편하게 장르물 범주에 넣고 정리하지 못 할, 아찔하고 심오한 메시지가  책을 덮은 후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작품의 무대는 이제 러시아를 넘어, 미국, 아프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소설의 시작이 레오가 라이사를 처음 만난 즈음, 그러니 그가 전쟁 영웅으로 전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가 사는 지금과 아주 멀리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렇게만), 그러니, 이 <에이전트 6>는 데미도프 트릴러지의 완결편이자, 동시에 시, 공 양면에서 현대사 상당 부분을 커버하는 총괄 정리편이기도 합니다. 아마, <차일드 44>를 제아무리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도, 작가가 이야기를 이렇게 웅대한 규모로 키웠다가 장엄하게 마무리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이 소설 전반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제시 오스틴이라는 캐릭터는, 아마도 실존 인물 폴 롭슨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1970년대에 (거의) 천수를 다 누리고 타계했으며, 소설에서 묘사되는 그런 비극(이런 게 실제로 벌어질 순 없죠..)에 연루되진 않았습니다. 비천한 가정에서 성장한 인물도 아니고,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로스쿨 졸업으로 학위를 끝낸, 건장한 체격을 한 풋볼 선수 경력에, 헐리웃 영화 다수 출연 경험까지 거친, 두루두루 축복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 부분을 흑인 민권 운동에 헌신하고, 가수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으며, 자신과 똑 같은 열혈 원칙주의자 타입 아내를 두었고, 말년이 가난했으며 정보 기관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점, 그리고 러시아를 몸소 방문한 사실(부부 동반이라는 데서 차이가 납니다만) 등은 이 소설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처음에 조금 나오다 말 줄 알았는데, 이건 웬걸 이 사람을 한 축으로 삼아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이 소설의 중핵을 이루는 미스테리의 발단이 됩니다.

미국에서의 참변이 봉합된 후, 진실은 유야무야되고 데미도프의 인생은 엉망이 됩니다. <시크릿 스피치>를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는 이제 무기력한 중노년 남자로서 어느 한지의 공장장 노릇으로 소일하는 신분이 된 반면, 아내 라이사는 학교 교장으로 승진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는, 뭔가 서로 뒤바뀐 형국이 되었더랬는데..... 이제 레오는 그 최소한의 안식도 빼앗긴 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거의 자멸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당국은 그를 체포한 후, 마지막으로 회생,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이상하게도 저는, 이게 관대한 조치처럼 보였는데, 그 느낌이 틀린 건 아니더군요. 나중에 이유가 나옵니다), 1980년대 가망 없는 소련의 도박이었던 아프간 침공의 현장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도로를 점령하지만, 우리(무자헤딘)는 나머지 모두를 다 가진다." 어째 이로부터 반 세기 전 있은 중일전쟁 당시 어느 진영의 모토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레오가 발 디디는 곳은, 도무지 사람이 사람의 참 모습을 간직하고 살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고, 아비가 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린치의 대상이 되게 하고, 정보 기관이 무고한 국민에게 누명을 씌워 불명예, 치욕의 극한에서 죽게 하고,.... 2부까지 읽어 온 독자들은 이게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는 대서양 저 건너편의 사정도 본질적으론 다를 바 없었으며, 오로지 평등과 자유만을 신봉한다는 검은 투사 역시, 결정적 순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바만을 믿기로 결심한다는 걸, 레오는 쓰디쓴 대가를 치르고 깨달으며, 이를 지켜 보는 우리들도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이 소설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는 "일기장"입니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담은 기록이 그 비밀 보전이란 소명을 못 지킬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레오는 또 한 번(사실은 더 앞에 벌어졌지만) 눈 앞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의붓딸 엘레나(1, 2부에 나온 그 아이입니다)의 일기장을 제때 훔쳐 보지 않은 과실(!)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운명에 처합니다(그는 스스로 이렇게 정리하고 있지만, 어차피 결과가 크게 달랐을까, 개인이 어떻게 정부와 대적하겠는가 하는 게 독자로서 제 생각이었고요).

이 결말을 두고 과연 행복한 엔딩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더버빌가의 테스처럼 빈사지경에서야 간신히 맞는 잠시간의 평안에 우리는 더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사악한 거대 권력(들)도, 레오의 필사적인 인간성 회복과 구원을 향한 몸부림(사적 원한이나 요구 때문이 아닌) 앞에선 잠시 자제하는 분별력을 보이더란 거죠. 굵직굵직한 현대 국제정치사 주요 국면 배후 곳곳에 "그"가 있었더라.... 물론 사정을 알면 웃음은커녕 숙연함에 고개를 못 들 느낌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진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쓰고 있을지, 새삼 전울하게도 됩니다. 무엇보다, 과연 우리는 생의 고비마다 맞는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서, 얼마나 사람답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고르는지, 진정 발가벗은 나의 진짜 내면과 맞대면하는, 깊은 성찰에 잠기게 해 준 독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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