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3, 암의 비밀을 풀어낸 유전자
수 암스트롱 지음, 조미라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서구권 저자들의 과학 관련 주제를 잡은 대중서를 보면, 건조한 화제 외에 "인간, 인간들의 활약"을 항상 그 서술의 중심에 배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 저자들의 사려깊음에 대해 언제나 감탄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버트 쿡 디건의 명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그렇습니다. 자끄 모노의 <우연과 필연> 같은 세기의 걸작 역시, 과학으로부터 인간을 먼 거리에 떨어뜨려 놓고 보지 않으려는 그 심원하고도 도덕적인, 오랜 전통의 인문적 사고가 낳은 아름다운 옥동자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 역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인류를 괴롭혀 온, 가장 무서운 질병인 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 - 빼어난 두뇌, 성실한 품성 모두를 갖춘 모범적이기까지 한 - 이, 사투를 벌이며 감동적인 릴레이 투쟁(그  외관이야 학문적 연구라는 우아한 모습입니다만)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저 책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읽은 과학 대중 르뽀 그 명예의 전당에 기꺼이 올려 놓고 싶습니다.

 

이 책 7장에 나오는, 한때 거의 p53 유전자의 세계 최초 발견자로 공식 인정될 뻔했던 바르다 로터 박사(여성입니다)의 경우, 그 어린 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집에는 (엄마 말고) 아빠, 그리고 p53이 있어요." p53의 연구에 전 일생을 걸고, 청춘의 정열, 장년의 노숙함 그 모두를 바친 어느 과학자의 개인사가 어떠했는지, 단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워렌 말츠만 같은, 젊은 나이에 너무 시대를 앞서가 동시대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학문적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묵살된 비운의 청년은 또 어떻습니까. 어떤 주제에 대해 당대 최고 수준으로 통달하려면, 그 주제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주어서는 안 되는, 거의 전면적이라 할 헌신과 봉사가 필요합니다. 그런 후에도 그에 합당한 보상(명예, 평판, 부귀)이 주어지라는 보장이야 또 없습니다. 오히려 질시와 폄하에시달려, 탄탄한 커리어가 꺾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뿐입니다.

 

p53이 뭐냐면, 처음에 세포에 기생하는 어설픈 작은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본격적으로 악성 종양, 암덩어리로 자라나, 우리 인간이 "암"으로 인식하게 되는 실체로 그 흉악한 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 무렵, 이 녀석의 암으로서 완성된 생장을 척 하고 나타나 가로막는 걸로 알려진, 우리 인간에게는 흑기사와도 같이 고마운 체내 단백질, 혹은 고유의 유전자입니다(인간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즈, 페스트를 비롯한 온갖 치명적 질병은, 그 원인이 바이러스나 세균 등 외부 생명체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미 퇴치가 이뤄졌거나 그 정복이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러나 암은, 이 병들보다 역사상 그 등장이 훨씬 오래 전부터 관측되었고, 그 무엇보다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원흉임에도 불구, 그 정체를 도무지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p53이 암 정복을 돕는 데에 핵심 인자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우리 선입견과 달리 훨씬 이전부터 과학자, 연구자들에게 아이디어로서 떠올라 있었습니다. 분명, 유의미한 다수 환자들의 개별 사례에서 이 p53은, 암 발현단계에서 그 억제의 청신호적 공통 분모로서 어느 경우에나 눈에 띄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분자생물학적 기반, 인간 DNA 구조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대단히 취약하여, 이것이 종양억제자라는 생각을 연구자 다수가 지지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암이 유전"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콧방귀를 뀌던 시절이었다는 거죠. 이래서 p53은 성배, 총아와, 천덕꾸러기, 맥거핀의 두 극단을 지난 반 세기 동안 오간 것입니다.

 

이 책에는 p53이라는 고지, 혹은 원군인 프레스터 존을 찾아, 가망 없어 보이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실낱 같은 가능성만을 붙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사명감과 열정만으로 그 우수한 두뇌의 모든 자원을 한 분야에 쏟아 넣은,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의 열전이 감동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암 정복이란 오랜 난제가 이제 그 완수를 카운트다운만 남겨 놓았다 할 지금, 우리는 "1등만을 기억하는 속물적 천박함"을 버리고, 우리 인류가 지금처럼 안온한 복지를 누릴 수 있게, 무대 뒤에서 분투한 그 숱한 연구자들의 희생과 감투 정신을 기릴 여지를, 우리 마음 속 기념관의 중앙부에 반드시, 겸허한 자세로 마련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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