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힙합 1 - 닥터드레에서 드레이크까지 아메리칸 힙합 1
힙합엘이 지음 / 휴먼카인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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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라고 하면 대뜸 제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란 기성 사회 구조, 체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든지 하는, 거창하고 정치적인 맥락에서의 자유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예쁘고 날씬하고 말쑥하게 보여야 한다는, 속물적 미의식이나, 자본이 조직적으로, 주기적으로 창출해 내는 "인위적 유행"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미 대륙의 트렌드에 언제나 민감했던 한반도 남쪽의 거주민들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 저변에 깔린 정신을 제대로 소화도 못 했으면서) 열심히 따라하고 있었을 때, 원타임이나 허니 패밀리 같은 연예인들을 롤 모델로 삼던 젊은 세대를 두고 "똥싼 바지나 입고 다닌다"며 어른들이 얼마나 눈꼴사납게 봤는지 모릅니다. 겉모습만 따라했을지 모르지만 은연중에 힙합 정신을 (컨벤션 일체를 거부하고 나선다는 소극적 범위에서) 구현한 게 당시의 젊은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띠지를 보면,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한 줄로 책의 가치를 평한 말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선명해지게 돕는다" 우리는 힙합 음악이나 패션, 그리고 그 이면에 덧붙은, 때론 끔찍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각종 스토리에 대해선, 어느 정도 들은 풍월로 익숙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힙합 뮤지션과 프로듀서,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 출신 배경, 공유 가치, 전통 등 인적(人的) 요소에 대해선 과연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아이스큐브(이 사람은 혐한 발언으로 일찍부터 한국에도 유명해졌습니다), 닥터 드레 같은 이름은 한 번 정도야 들어본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에미넴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비교적" 최근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험악한 아우라에 딸려 오는 왠지 불쾌하고 반사회적 이미지만 막연히 재생될 뿐, 이들 "사람들"이 보여 준 음악적 개성과 철학, "경제적 성공" 혹은 그들 상호간의 사연과 네트워크, 대립 구도에 대해선 잘 아는 바 없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해당 챕터 담당 집필자가 "나만의 아이돌"로 표현한) 나스와, 그의 영원한 라이벌 제이지(Jay Z) 사이의 운명적 대결을 여러 시기에 나눠 분석한 대목입니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만, 꼭 누구 보는 눈이 신경쓰여서라기보다, 나스 같은 이를 "우상"으로 고백하면 좀 어울리지도 않고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필자께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그러나 "아이돌"이라고 하면, 선호와 애정(때로는 애증?)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도덕적 평가"나 "롤 모델"로의 승격까지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아이돌이되 우상은 아니"라는 서술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네요.

 

담당 집필자분은 "나스는 일찍 알아도 제이지는 늦게 알았다. 하지만 일찍 알아서 들었다고 음악이 닳는 것도 아닌 만큼, 늦게나마 (특정 앨범을 계기로) 열심히 들었고 그 가치를 이해하니 충분하다고 여긴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하나 공감가는 서술은 "어렸을 때 나스를 좋아한 팬으로서 그의 라이벌 제이지는 그만큼 미워했는데, 어린 나이에 어울리는 충성심의 표현"운운한 부분입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 배우, 야구팀에 대해 같은 태도를 가졌거든요. 그러다가 해당 영역, 장르 전체를 보는 눈이 떠지면, 그때부턴 성숙하게 두루 애정을 주고(물론 첫사랑과 비길 수는 없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애가 어른이 되는 겁니다. 이 책은 이처럼, 힙합이란 전문 주제를 넘어 인생사 일반에 대한 폭 넓은 소회와 성찰이 간혹 비쳐져서, 힙합 뮤지션들이라는 "사람들" 못지 않게 "육성을 통해 개성이 느껴지는" 저자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책은 힙합 뿐 아니라, 시대상과 유리되지 않고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 표현, 재생산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 사회적 맥락까지 소개하고 있어 깊이를 지닙니다. 예컨대 제이지는 2001년, 진정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는 음반 <블루프린트>를 발매, 평단과 팬들로부터 열광적 호응을 얻었는데, 물론 제이지 같은 사람(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나 심지어 비평가들도) 911테러에 대한 어떤 역사적 인식 등을 (내심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음악에 집어넣는다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 준 그 서술, 힙합 뮤지션과 역사적 사건 간의 상관 관계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그 설명의 관점이, 독자로서는 깊은 성찰이랄까,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게 되죠.

 

힙합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닥터 드레, 나스, 제이지 등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서술 비중이 워낙 크고, 다른 주제를 거론한 장에서도 이 이름들이 빠질 수가 없어서, 얼핏 보면 이들 거물들만 다룬 책 같지만, 집필진은 세심하게 다른 뮤지션도 적절한 장소에서 일일이 커버하고 있습니다. 힙합 장르는 인적 연계(협동 뿐 아닌 대립 역시)의 파악이 중요한데, 이 책은 인물 열전식이 아닌(열전 성격도 없지는 않으나), 주제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결국 힙합, 아니 그 어떤 음악, 예술 영역도, 정해진 공식이나 자본적 추동력이 아닌, "사람들"이 이뤄내는 작업이요 결과물입니다. 이 책은 분량이 아주 많지는 않고, 다루는 기간도 21세기에 (대체로) 한정하고 있음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독자, 일반 팬이 더 깊은 이해를 다질 수 있었던 게 큰 보람으로 남습니다. 저자들께서 다음 기회에 "힙합 전사(全史)"를 커버하는 대백과 기획으로 독자의 갈증을 채워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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