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최준식 지음 / 시공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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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정신 영역의 일부입니다. 이성과, 이성에 기반하여 인간의 모든 정신, 행동, 선택, 결단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합리주의가 서구의 사조를 휩쓸 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이 사람들이 무의식에 대해 취한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무시하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이들만이 집착하는 미성숙한 "태도"의 일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S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이란 엄연히 우리 정신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며, 해당 영혼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모아졌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오히려 기라성 같은 현인들에 의해, 무의식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된 바 있습니다. 다만, 저자 최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대로, "집단 무의식 외 개인 무의식이 주목되지 못한 탓에" 프로이트 같은 선각자 한 사람의 기여만도 못한 진도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인간이 주위와 잘 융화하고, 내면의 자아와도 불화하지 않으며(이것이 잘못되면 온갖 정신질환과 신경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아가 언제나 맑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 무의식의 균형을 잘 잡는 게 필수적입니다. 다만 그 무의식이, 불건전한 집단 동조 현상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마치 좀비와도 같이, 양심 실종, 죄의식 부재, 타인에의 책임 전가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무의식적 동조(confirmity)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예증하기 위해, 한국 일각에 만연한 사이비 종교 집단과,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의 악행을 들고 있습니다. 사이비종교 집단이라고 해서, 저학력, 저소득, 취약 계층 출신만 모인 건 아닙니다. 직장에서 멀쩡히 제 기능 잘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일상의 일을 처리할 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도 있죠. 사이비 신념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반사회성향이 강할 듯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수가 더 많습니다. 이들 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자기들 종교 집단끼리만 모여 있을 때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그것도 조직을 갗춘 상태의) 다수인들이 전부 특정 방향의 행동을 취하니, 그게 보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특수 집단도 소(小) 사회라고 보았을 때, 이들은 지극히 "사회적 성향이 강한" 성원들이 되어 "질서"를 충실히 따릅니다.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죠. 공감무능력은커녕, 이들은 자신이 속한 소집단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인류 보편의 대의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밀접 관계를 맺고 있는 네트웍에 대해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는 데에 연원합니다. 이들도 아마,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하여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려는 자국 내 소수자(본회퍼 목사님 등)에 대해서는, "공감무능력자"라며 마녀사냥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소위 "대세"라는 것에 대해 이를 진정한 권위로 착각하여, 그 앞에서 아무 도덕성이나 이성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인간이 무의식보다 의식에 의해 자신을 매 순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런 역사적 우행을 저지르는 함정에서 얼마든지 벗어났을 것입니다.

 

저자는 한국전 당시 미국포로들이 플랭카드까지 들고서 "북침으로 벌어진 6.25"라고 주장하게 세뇌되었던 사례를 들며, 인간 정신 작용에서 의식,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낮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세뇌가 되었다 해도, 이를 "디프로그래밍"한 후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엄청난 강도로 혹사를 당한 후 이른바 "demonic angel"에 의해 달콤한 어조로 주입된 생각, 사상, 아이디어는, 이후 이 사람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강철 같은 의지로 영악하게 자신의 행동과 신념을 일일이 통제하는 "이성적 인간"의 관념은, 이런 뚜렷한 실증 앞에 허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인간이 건전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능한 한 최고 수위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면,  자신의 행동과 기호, 생각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어느 사무라이와 사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집단 무의식의 수레에 끌려가며 썩은 의식으로 정체(停滯)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라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 행동이 남의 행동을 무턱대고 모방하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과 준칙에 의해 이뤄지는 건지, 언제나 반성해 보는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아이를 과도하게 지배하여 자신의 (좌절된) 이상을 투사하려 드는 부모의 engulfment 심리/증상도, 결국 부모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지 못한 여한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려는 비극적인 시도입니다.

 

이런 자기 성찰 습관이 몸에 밴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유연하게 자신의 방침을 수정해 가면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인간일수록 마지막 자존이나 되는 양(혹은 누릴 걸 못 누린 불우한 처지라 이런 데서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듯) 자기 스타일을 조금도 고치지 않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오히려 양보를 하고, 전혀 타의 기준 노릇을 못할 사람은 자기 영향권을 더 늘려 가니,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퇴보를 거듭하는 게 다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의식의 세계로 첫발을 디디게 된 프로이트,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이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던 융의 입장을 재미있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개인 무의식"의 세계를 이론적으로 처음 해명하여, 인류가 무지의 장막 뒤에 불안스럽게 감추고 있던 거대한 영역을 우리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성욕 일원론적인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반대하는 편이며, 오히려 (개인 영역이건 집단성이건) 무의식을 "지혜의 보고(저자의 규정입니다.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되더군요)"로 규정한 융의 세계관이 더 너른 효용성을 지닌다고 간주합니다.

 

이미 미국에선 의학협회, 이후 정신과 의사 단체에서 요법 중 하나로 공식 인정한 "최면"에 대해, 저자는 여러 챕터에 걸쳐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점 중 첫번째 것은,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최면술사 한 마디에 바로 최면에 빠져들어, 무려 "전생"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의 "쇼"가 일반인들에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 최면에 절대 안 빠지는 이도 있고, 반대로 유명한 허버트 스피겔이 마주한 어느 군인처럼 단 한 마디로 최면에 죽은 듯 빠져드는 아주 드문 타입도 있다는 거죠. 주문 한 마디에 줄줄이 표준 체질의 성인이 최면에 빠져들 수는 없으며, 하물며 최면에 걸린 채 무의식이 털어놓는 스토리가 "전생 사연"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지적합니다. 전생을 믿고 안 믿고, 또 그것이 실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최면 중 발화와 전생(의 기억)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여튼 "꿈"은, 분명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대화를 나누는 장(場)입니다. 이런 채널을 적절히만 활용하면, 개인의 무의식과 의식이 균형을 잡게 도우므로 아주 유익하다는 지적인데요. 한 예로 말레이의 세노이 족은, 범죄 발생률이나 정신질환자 유병률이 거의 0에 가까워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아이들이 꿈을 꿀 때, 원로들이 자상하게 상담해 주며 "다음 번 꿈을 꿀 때는 이러이러하게 (꿈 속에서 과감히)행동해 보라"고 조언해 주는 게 오랜 관행이라는군요. 이렇게 어려서부터 "정신 요법"을 생활처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서를 유지한다는 게 저자의 소개입니다. 참 귀가 솔깃해지는 토픽이 아닐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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