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 워 Civil War 프로즈 노블 - 그래픽노블 <시빌 워> 소설판 마블 프로즈 노블
스튜어트 무어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코믹스 마니아라면 익숙한 용어겠지만 일반인들은 "노블이면 당연히 프로즈 노블이지 그럼 포에틱 노블도 있단 말인가?" 같은 의문을 떠올릴 만도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작품은 은근 포에틱한 구석도 많습니다. p132에 나오는 대로, 영 어벤저스 팀 공식 트위터에 뜬 마지막 멘션 "토니 스타크, 피도 눈물도 없는 상위 1퍼센트"를 두고  마리아 힐 국장(대리)도 그런 평가를 하지만, 이 프로즈 노블은 전혀 prosaic하지 않으며,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만큼 컬러풀하고, 캐릭터들은 오리지널에서와 완벽한 일관성,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사실,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이 운문의 영역에서 적절한 함축의 미학과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면, 이 프로즈 노블은 캐넌의 여백을 두고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의문이나 의견 갈림을 해소해 주는, 마블의 "유권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 경전(믈론 이 프로즈 노블도 경전입니다만)에서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배경 묘사를 보고 "고맥락 소통"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던 독자들은, 이 프로즈 노블을 통해 비로소 그 개개 장면에서의 정확한 의도들이 각각 무엇이었는지 알고 개운한 기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격적인 노출 코스츔으로 남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타이그라


그렇다고 프로즈 노블이, 원전의 주석집이나 보조 미디어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해당 팬덤에서 알면 기겁을 할 일이지만, 파생 예술인 영화에는 열광을 하면서도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에는 거리감,... 혹은 경멸감 비슷한 태도를 고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코믹스 특유의 글꼴이나 레이아웃 뿐 아니라, 작품들이 지향하거나 전제하는 미의식, 주제관념에까지 같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블 코믹스에서 어언 반 세기 넘게 창조하고 키워 오고 그들만의 웅대한 우주를 가꿔 온 그 다양한 캐릭터들이, 소위 본격 문예에 등장하는 가상의 피조물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개성, 매력, 인격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이 즐거운(물론 때로는 심각해지는) 놀이동산에 불러들여 동참자의 기쁨을 공유하게 하려면, 이런 프로즈 노블판이 그 수단으로 제격일 것입니다. 사실, 스튜어트 무어의 이 작품은 구태여 "프로즈 노블"이란 범주에 넣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훌륭한 한 편의 판타지 소설입니다.



저는 아직 코믹스판 오리지널 <시빌 워>를 다 감상하지 못했지만, 지인들에게 듣기로는 제가 읽은 이 프로즈 노블 버전과 스토리 전개상 크게 상이한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그래서도 곤란하겠습니다만). 내용은... 소위 뉴 워리어스라는 팀을 이룬 틴에이저 슈퍼휴먼 4인조가, 리얼리티 쇼 제작팀과 함께 기획한 빌런 소탕전을 벌이다가 나이트로를 어설프게 건드려,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일대에 큰 폭발 사고를 빚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뉴 워리어스가 결정적 과실을 범한 건 아니고, 나이트로가 워낙 악질인데다 능력치는 또 탁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평소 슈퍼휴먼들에게 두려움, 질시, 근거 없는 경계심을 품고 있던 일반인들은 이 대형 참사를 계기로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게 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언제나 균질적인 성원으로만 조직이 이뤄질 수 없고, 어떤 조직체, 공동체라도 분파가 생기고 그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마련입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이들이 있고, 싸움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조정과 타협을 통해 공동선을 도모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언제나 소수이며, 그들의 의도는 종종 정치적 패권 추구라는 오해, 혹은 의도적 모함을 받습니다. "저 괴물들과 더 이상 한 지붕에서는 못 살겠다!" 다만 영화판 <X-men>에서와 달리, 이 통합 어벤저스 유니버스에서는 평범한 인간들도, 조직력, 뻬어난 기술, 수적 우위, 자금력, 치밀한 전략적 사고 능력 등을 통해, (비록 많은 희생이 따를지언정) 이 슈퍼휴먼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승산은 어느 한 편에 크게 기운다고 볼 수 없으며, 마치 (실제 역사상의) 아메리칸 시빌 워가 그랬듯 우연의 개입이 어느 쪽에 유리하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승패의 양상이 곤두박질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 토니 스타크부터가, 운명적으로 슈퍼 휴먼 진영에 서야 하는 인물이 아니고, 얼마든지 평범한 인간들 편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육체적, 신분적 조건으로나, 그가 견지하는 신조, 혹은 개성으로 봐서나요. "당국의 간섭, 규제가 기왕 피할 수 없는 추세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들에게 맡기느니 사정 훤히 아는 내가, 우리가 주도해서 이 위기를 수습하자." 사실 "등록제"란 건, 개인, 시민의 자유, 존엄, 긍지를 심하게 훼손하는 조치이며, 공존을 거부하는 차별, 배제, 제노사이드의 전단계일 수 있습니다(나치의 유대인 등록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까닭에 캡틴 아메리카 같은 이는 "영웅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거구요(그는 힐 전 사령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실로 서사시적인 위엄, 레토릭을 과시하며 자기 사전에 타협이란 없다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만의 면모를 또 과시하며 극적인 단독 탈주에 성공합니다 - 이후 새 팀을 짜죠).

차별이건 특별 관리이건 그것이 외부로부터 이뤄지면 억압이고 차별이지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면 그건 "자치"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정부와 유리한 교섭을 벌여, 슈퍼휴먼의 성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눈 후, 문제 개선의 여지가 없거나 위협 요인이 될 그룹은 통제 하에 두고(한국어 번역에선 "수용소"라고 하는데, 이건 좀... 너무 비참한 느낌입니다. 원어는 아마 concentration camp였겠죠), 반대로 정상적인 그룹은 정부의 지원을 받되, 정부가 통제하는 조직에 소속된 채 (그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범죄 저지, 재난 구호에 나서게 하자는 겁니다. 이 등록 과정에서 또 하나 곤란한 게, 신원을 가려 주던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벗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능력 있는 토니 스타크 회장이라면 이 점 역시 융통성 있는 규율이 가능했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므로(?) 이 강제조항이 완화, 예외 없이 입법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어벤저스의 영원한 대장님 캡틴 아메리카가 격하게 반발하고 "레지스탕스"를 결성하여 지하로 잠입합니다(성격상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것 우리 모두 예상 가능하죠). 마블 유니버스의 팬들로서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슈퍼 휴먼들 간의 자체 반목, 항쟁이 여기서 시작되며, 이것이 원작, 영화 버전, 그리고 이 프로즈 노블 <시빌 워>에 공통적으로 깔리는 모티브입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을 따르는 초인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유의지대로 영위하는 삶을 위해서는, 싸우는 길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자유는 피를 흘려 쟁취해 내야 하고, 그 싸움을 위한 수단 일체도 우리 힘으로 조달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도 우리의 전쟁을 시작하자!" 언제나 그의 대사가 그렇듯(일상적인 말도 그의 입에서는 다 "대사"가 되죠? 전쟁영웅들이 흔히 그렇듯요), 분위기는 장중하고 내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슈퍼휴먼들이, 인간들에게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거나 큰 위기에 빠지는데, 한 사람은 휴먼 토치, 즉 조니 스톰이며(맥주병으로 맞은 후 발로 차이기까지 해서 뇌로부터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아요), 다른 한 사람은 순간이동이 가능한 어린 위칸입니다. 다치느 사람 뿐 아니라, 죽은 이들도 속출합니다. 프롤로그에서 벌써 뉴 워리어스가 모두 죽었고, 특히 우울 모드에 빠진(지병이죠)  스피드볼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이처럼, "내전"은 승패, 혹은 어느 한쪽의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꽤 주도면밀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정부도 분노한 대중의 여론만 등에 입었을 뿐, 정작 전쟁이 터지면 이를 수행할 전략과 수단(특히 테크놀로지)은 토니 스타크 측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아마 그는 캡틴 아메리카, 혹은 누가 중심이 된 반발 세력의 항쟁을 예상했을 테고, "복제 토르"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 대비책도 벌써 완벽하게 세운 듯 보입니다. "신을 복제해 놓았다니 대체...." 이에 비하면 국장 대리 힐의 역할은 찌질하거나, 하는 일도 없이 강경책만 고수하는 무책임한 관료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돌아서는 토니 스타크를 향해 그녀가 던지는 한 마디는 의미심장합니다. "당신은 우리 편에 섰어요." 우리가 당신을 고른 것만도 아니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이 말은, 결국 이 "시빌 워"의 본질에 대해 깊은 함의를 풍기고도 있습니다.

한편 그런 복잡한 "정치, 군사 이슈"를 떠나, 우리가 사랑해 온 캐릭터들의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도 이 프로즈 노블에는 진득하고 곰살궂게 묘사됩니다(오리지널에 없는 대목이 여기서 많이 나옵니다). 스파이더맨 피터는 본디 compliant한 기질이니만치, 토니 스타크의 구상에 가장 먼저 호응하고, 또 우리 아이언맨 회장님이 앞으로의 자기 구상에서 가장 크게 기댈 인재이기도 합니다. 피터가 "메이 숙모님의 안전을 지켜 줄 수 있나요?"라고 묻자, 회장님은 "우리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은 지켜진다. 먼저 죽는 쪽은 아마 나겠지만 말야."라고 대답하는데, 이게 가슴을 참 찡게 만들더군요. 우리 아이언맨님의 평소 시니컬하고 재수없는 성격을 감안하면 더 그렇죠.

판타스틱 포의 두 기둥인 리드 리처즈와 인비저블 우먼 수 리처즈(이제는 결혼을 했으니)가 엮어 나가는 다정한 가정상에 대한 묘사도 독자를 흐뭇하게 합니다. 프랭클린과 발 두 아이들도 이제는 제법 컸습니다. 워낙에 가정적이고, 그렇게 두뇌가 뛰어난 사람치고는, 마치 연봉 삼천짜리 대리가 보일 법한 소탈함과 겸손함으로 자기 인격을 채우는 리드, 우리가 익히 잘 알듯 아이와 아내 사랑이란 세상 누가 따라할 수가 없을 만큼이죠(토니 스타크와 큰 대조를 이루는 면). 그런데 동생이 큰 변을 당하고, 골리앗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등 사태가 악화 일로로 치닫자, 수전은 큰 동요를 일으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이며, 이제 이런 수를 리드가 어떻게 달랠지, 나아가 양 진영의 근본적인 대립은 어떻게 해소될지, 이게 우리 팬들이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좀 우스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피터가 극적으로 커밍아웃(...)한 건 또 그렇다 쳐도, 모교 강연장에 바로 닥터 옥토퍼스가 찾아와 난장판을 친다는 게.... 인물들의 촌철살인 위트도 여전하고, 무엇보다 이 프로즈 노블은 주제의식 면에서 한 층의 레이어를 덧입습니다. 제가 맨 위에 적은 "상위 1퍼센트... " 운운에서 알 수 있듯, 이 서사 구조는 현재 갈수혹 태산이라 할 미국 사회 빈부의 양극화와 극심한 정치 분열상을 풍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슈퍼 휴먼은 곧 슈퍼리치이며, 토니 스타크가 개인별 카드에 초능력을 "선천적/후천적"으로 구별하는 건, 곧 "상속형/자수성가형"의 범주와 대략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죠. 원작도 그렇지만, 이 프로즈 노블 역시 각 캐릭터들이 고루고루 등장하면서도, 인기도 혹은 역사적 무게에 비례하여 그 출연 비중이 교묘하게 잘 조율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스튜어트 무어나 마블 프레스가 어련히 알아서 정교한 기획을 이뤘겠습니까만 말이죠. 이런 책은 역시 시공사에서 나와야 제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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