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연인 2 - 개정판
유오디아 지음 / 시간여행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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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상 어떤 악평과 함께 기록된 이들이라 해도, 한결같이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최소한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혹 누가 좀 표독스럽게 군다 싶어도 그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를 할 수 있는, 어떤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악역이었는데요. 이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악당들이 악당으로서의 제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 중 한 명이 인빈 김씨, 정원군의 생모이고, 1권에서 "(공빈 김씨를 가리키며) 수랏간에서 이름 없는 나인으로 그냥 묻혀 죽었어야 했거늘.."이라며 수수께끼 같은, 독한 말을 내뱉던 그 사람입니다. 성격이 좀 못된 정도가 아니라, 이 2권 분량에서 주인공 경민이가 겪게 되는 온갖 고초의 원인을 제공하는, 아주 악질적인 음모를 꾸미는 원흉입니다.

인빈 김씨는 말 그대로 교언영색, 상황에 따른 연기와 변신에 능한 악귀 같은 인간형입니다. 선조는 좀 멍청한 인물로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후처의 본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궁정 안의 난맥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무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영리하고 유능하다곤 하나 광해군 역시, 이런 아버지의 속마음에 대해 끝내 오판한 걸로 보아, 약한 마음의 줏대가 결국 그 지혜를 가린 비극적인 인물로 설정된 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게다가, 결국 이명의 출생 사연에 대해 정확한 진상을 알지 못하고, 경민이의 (두 차례에 걸친)설명을 듣고 난 후에서야 전모를 파악하게 됩니다. 한 번에 알았으면 그나마 정원군을 역모로 모는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테며, 뜻하지 않게 자신의 귀한 아들을 잃는 참척도 겪지 않았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어린 이종(능양군이며 나중의 인조)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광해군은, 부친에게서 버림 받았다는 그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커서, 이후 명민한 판단력을 유지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장애를 겪은 걸로 나오고 있습니다.

1권에서도, 웹소설의 주인공 답지 않게,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2년이라는 긴 세월을, 험한 과거에서 버티고 참고 인내하는 경민이의 행적을 보며 조금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현대에서 비교적 넉넉한 가정 형편에다 안락하고 즐거운 것만 찾아다니던 10대가, 아무 편의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비인간적인 법도가 일상 구석구석을 속박하는데다, 겉만 아름답게 꾸몄을 뿐 속은 짐승 같은 탐욕과 간계가 지배하는 오백 년 전 궁중 생활을, 두 달도 아니고 2년을 버틴다는 게 가능할 법하지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딴 걸 다 떠나서 먹는 것부터가 변변치 못하겠고, 병이라도 걸리면- 실제 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1권에서 - 어떻게 살아남겠습니까? 그런 걱정 때문에라도 편히 못 지낼 것 같네요). 헌데 이 2권에서는, 인빈 김씨에게 매를 맞고, 턱없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거나(더군다나 애를 밴 몸으로) 죽기 직전까지 가질 않나, 천리 밖 제주도에까지 귀양을 가서 험한 생활을 5년이나 겪지 않나... 이 정도면 고대 소설의 전형적 평면적 캐릭터들이 겪던 고초 그대로입니다. 톡톡 튀는 매력으로 두 왕자를 사로잡은 자유로운 영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주인공이 이처럼 모진 고난을 겪고도 독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건, 경민이의 내러티브가 로설 주인공답게 시종일관 밝다는 그 이유 하나뿐입니다. 1권에서 겪은 고생만으로도, 육체적 상해가 아니라 정신이 입은 내상, 그 스트레스 때문이라도, 평균적인 현대인이라면 몇 달을 못 버티고 죽을 것입니다. 이 2권에서 문자 그대로 온갖 개고생을 하는 경민이, 이해가 안 갈 만큼 힘을 못 쓰고 상황에 끌려 다니는 광해군. 이 두 남녀 주인공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광해군이 저처럼 무기력한 채로 남아 있는 걸 납득시켜 주는 건, 다름 아닌 소설의 치밀한 배경 세팅입니다. 이 16세기 말 궁중에선, 대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이 안 가고, 어떤 이가 강자였다가 한순간에 약자의 음모에 넘어가 숙청을 당할지 내다볼 수 없는 혼전의 연속입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는, 광해군 아니라 누구라도 혼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작가의 지긋한 암시 같습니다.

1권 리뷰에서도 지적했지만, 유일하게 기사도 정신(?)에 빛나며 영혼의 순정을 지키는 사람은 정원군입니다. 그는 몸을 던져 정인(情人)의 안위를 지키고, 생모의 더러운 흉계가 효과를 못 보게 저지합니다. "이게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짓인데...." 땅을 치고 통탄하지만 분에 넘치게 훌륭한 아들을 둔 덕에 인빈 김씨의 포부는 날개가 꺾입니다. 여주를 더 많이 사랑하는 남성이 대개 인격적 가치도 비례해서 높기 마련이니, 소설에서 더 큰 비중에 값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정원군의 행보는 이에서 더 벗어나질 못합니다. 경민이는 결국 이런 그의 연정을 모른 체하며 제 갈 길만 가는 걸까요? 겉으로는 영악하고 당차 보이며, 본색이 현대인이니 당연히 또 그리 굴어야 합니다만, 광해군 못지 않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경민이란 여성이더군요(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 여자애가 아닌 성인여성입니다. 애도 낳고 산전수전 다 겪은 처지입니다). 이 2권에서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경민이네 집안 내력인 시간여행자를 구속하는 규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니, 3권의 재미를 충분히 캐내기 위해선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평행우주 관점을 전면 부정, 배제하며, "시간 여행자와 시간의 투쟁"이란 관점을 도입한 게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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