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 - 가사로 읽는 한대수의 음악과 삶
한대수 글.사진 / 북하우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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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 사진도 그렇고, 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사다 모으신 몇 장의 앨범 재킷도 그렇고, 한대수 선생의 얼굴을 담은 컷들은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한 번 보면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스크, 표정, 주름살, 눈빛... 저는 그분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도 아니고, 지금 들어도 그리 깊은 공감을 이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으며(혹은 들을 뻔하며) 대학 시절을 보낸 어른들, 그리고 (세대를 초월하여) 여러 뮤지션들은, 그의 가사, 곡조, 보컬에 녹아 있는 깊은 feel과 자유혼에 완전히 매료된다고 합니다. 한대수의 음악은 지구상에서 한대수만이 만들고 부르고 연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작 도이처는 레온 트로츠키의 전기 3부작을 쓰면서 마지막 권의 제목을 <추방당한 예언자>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이 한대수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이분 역시 그런 별칭으로 (감히)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말끔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신의 음성을 전달했다기보다, 일종의 법열에 들떠 피안의 진리, 묵시의 비전을 대중에게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대수 선생이, 엄혹한 군사 독재가 민중의 숨줄을 짓누르던 시절, 노래를 통해 작시(作詩)를 통해 이 땅의 민중과 교감하려 했던 바는, 자유와 해방과 인간 본연의 기쁨의 회복 같은, 특정 신앙에 구애 받지 않는 보편의 휴머니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음악이 나왔을까 싶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그의 가사는 몽환적입니다. 이 책은 별권부록으로 악보집이 함께 딸려 있고, 본권에는 그가 찍은 사진, 그가 만들고 부른 대표곡들의 가사, 그리고 그의 비밀스런 사연과 가족사,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과 세계인들을 향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명문 경남중을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고교를 나왔고, 대학 졸업 후 유력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다 낸 음반이 모조리 판금 조치가 되는 바람에 다시 도미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첫번째 부인은, 안정된 생활의 보장도 마다하고 "당신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미국으로 가자"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결국 파경을 맞으시긴 하나, 저는 당시의 여성이 이 정도로 과감하고 깨어 있는 생각,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부창부수, 과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싶었습니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가사도 사실 난해합니다. 그의 음악에 공명하는 이들은 그런 문자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열광을 보내었습니다만, 이제 칠순을 바라보시는(그리고 건강도 썩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이 거장의 세계를 후대인들이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처럼 작시, 작사의 동기가 무엇인지, 각 시어가 어떤 해의로 다가와야 하는지, 아티스트, 포우이트 본인이 직접 내린 "유권해석"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도 출간이 적실했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는 가사만 보아서는 전폭 몰입이 어려우며,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배경음악으로 그의 마스터피스를 깔아 놓고 독해해야 비로소 온전한 감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작사는 그의 작곡만큼이나 그의 유니크한 감성, 예술혼의 산물이기에, 애써 독립문학으로 간주하자면 그에 알맞은 해석론 전개가 역시 가능하긴 할 것입니다.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거론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입니다.

저는 이분의 존재감을 2000년경, 김현철이 진행하던 KBS FM 심야프로애서 게스트로 출연하셨을 때 청취자로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 무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는 HOT가 한국의 음반시장을 독식할 때였다. 내 봐야 팔리지도 않을 한대수의 음반을 누가 제작할 것인가?" 손무현 등 뜻 있는 뮤지션들이 힘을 모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며, 그는 책에서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HOT와 한대수.... 생각해 보니 정말 모든 코드에서 극과 극이라 할 만한 이들이었네요. 저 무렵만 해도 아직 정력 좋아 보이는, 기질 드세고 직정적인 이미지의 아저씨였는데, 이제 그는 누구의 눈으로도 노화를 부인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 방송에서도 그렇게나 "사랑"을 강조하시더군요.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사랑을 못하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이 책에도 에이즈 관련한 여러 언급이 나옵니다만, 당시의 그는 국제 에이즈 퇴치 기금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이 20대, 혹은 그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아동 시절 어떤 모습이셨을까가 궁금했는데, 책 말미에 여러 컷이 실려 있어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저는 한 선생의 부친이 어떤 경위로 어린 아들,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핵물리학자인 그는 (이 책에서 아들인 한대수 선생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미국 정부에 의해 모종의 조치를 당하여, 납치 후 강제 기억 상실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언급하며 그는 소련의 스파이란 혐의를 쓰고 사형당한 "긴즈버그 부부"의 예를 드시고 있는데, 긴즈버그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 주자며, 그 사건의 주인공은 로젠버그 부부입니다. 집필 중 착오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기억을 잃어 버린 그는 미국인 여성과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이분을 한대수씨는 "미국 엄마"라고 부르시더군요. 물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바대로, 한대수씨에게는 그의 10대~20대를 열성으로 보호해 준 유명 피아니스트인 모친이 따로 계십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 그는 조부모부터 해서 실로 화려한 가계를 지닌 분입니다.

15년 전 방송 출연시에도, 선생은 두번째로 맞은 아내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이 차가 이십 년 가까이 나는 러시아 국적의 여성이시죠. 그 당시엔 언급이 없으셨는데, 이후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생겼나 봅니다. "양호"라는 이름의 귀여운 소녀가 이 책 곳곳에 모습이 나옵니다. 선생도 노령이지만 아내분도 임신 당시 노산이라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아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 이름을 그리 지으셨다고 합니다. 책에는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 여사의 누드가 두 컷인데, 풀 프론틀 샷이니 주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앨범 자켓에 쓰자고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단 말밖에 안 나옵니다. 아내 사랑이 극진함을 여러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었고,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책 말미에 나오듯 여사는 현재 알코올 의존증으로 매우 큰 고통을 치르시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이 이러시니, 보는 이들이 깊은 우려를 떨칠 수 없겠죠.

책은 깔끔하고 담백한 구성입니다. 다 읽고 나서 "그렇게도 무거운 내용이었던가?"를 생각하며 잠시 놀랐을 만큼요. 신중현은 10.26이후 "하늘이 나를 살리고 박정희를 데려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한대수 선생만큼 한반도의 1970년대를 몸으로 치열히 살아낸 분도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이 유행어로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선생은 그 살아 있는 표본으로서 순일한 이데아를 보여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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