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김진섭 지음 / 용감한책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은, 그 상상의 실현 난도에 비례하여, 품기에는 더 달콤해집니다. 쉽게 이룰 수 있는, 혹은 조금만 노력하면 안 될 것도 없겠다 싶은 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주인공 L는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노총각입니다. 지방대를 다니며 ROTC 복무로 남들보다 더 늦게 사회로 귀환한 그는, 일단 전역장교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일자리인 보험 영업직을 선택합니다. 학벌도 능력도 특출한 바 없는 그였지만, 한 번 정도는 전성기가 찾아오는 이 업종의 특성상, 정말 한 때 연봉 8천에 이르는 성과도 낸 바 있습니다. 그 후로는 슬럼프라 과거 실적에 의거한 수당과 약간의 실적만으로 간신히 수입을 채우는 그인데, 솔직히 보험영업이란 게 다 그렇겠죠. 처음에야 있는 인맥 없는 연줄 다 그러모아서 잘나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소설의 "상상", 혹은 주된 줄거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성 U, 학교도 자신보다 나은 수도권 상위대를 나왔고(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보기엔 그렇다는 의미겠죠), 키도 크고 예쁜(...) 편인데다, 나이도 어린지라(이 비서직은 알바일 뿐입니다. 곧 정식 취업을 할 것으로 기대 중이죠), 사실 자기 깜냥으로 넘볼 수 없는 상대입니다. 본인 눈에도 그렇고, 제3자 눈엔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U는 성격이 착하고 사회의 때가 덜 묻어서, 한때나마 잘 나갔고 뭔가 듬직하고 진실해 보이는 L을, 같은 사무실 안에서 줄곧 얼굴을 마주대하는 그 정(情)으로, 남친 비슷한 사이까지 진행시킬 수 있는 그런 여성입니다. 결국 그 비슷한 사이까지 가서, 카톡의 상태 메시지와 프로필 사진을 매일 저녁 L이 혼자 훔쳐 보는 장면은, "서로 하는 짝사랑(책에 나오는 표현입니다)"이란 이상한 상황에 빠져 본 이들은 공감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인공 L의 꿈, 상상은, U를 향한 연정 외에 더 큰 게 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꿈"입니다. 보험 영업직이 흔히 그렇듯, 사무실에 출근만 하고 혹 일이 없으면 그냥 시간을 때웁니다. 이것 비슷한 게 금융사 채권 추심 업무죠. 이분들도 참, 남들 보기엔 편한 팔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자신들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입니다. 사기나 의욕은 더 이상 바닥을 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죠. 그러나 L은 그렇게, 남은 시간을 모두 "집필 작업"에 바칩니다. 그에게는 오직 달콤한 꿈이 있기에, 타자 치는 시간이 즐거운가 봅니다. 늙수구레한 중노년 작가 지망생이, 혹시 출판사의 눈에 띄지나 않을까 하는 길거리 캐스팅을 바라는 요행심리로 하루 종일 집필 아닌 집필에만 목을 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지만, 자신은 그것과는 다르다며 당당히 투고를 출판사에 대고 시도합니다. "제 이야기를 한번 읽어 보시고 출판을 검토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습니다. "주신 원고는 잘 읽었으나 저희 출판사의 방향과는 잘 맞지 않는 듯합니다." 심지어 어떤 담당자는 "작가님, 작가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말까지 합니다. L에게는 비수와도 같은 상처를 남기지만, 솔직히 읽는 저로서도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 친한 친구가 자기 사연을 구구절절 끄집어내어도 그거 들어 주는 게 고역입니다. 하물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설사 유명인사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돈까지 받아가며 듣기(=읽기)를 청한다면, 시간과 돈이 아깝다 이전에 그저 피곤해서라도 그 시간에 잠을 청하고 싶은 게, 회사 다니는 이라면 다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 작가를 폄하해서가 아닙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굴 폄하하고 낮춰 볼 여유도 차라리 사치에 가깝습니다. 그럴 시간에 일하거나 쉬거나 해야죠.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인생이, 요즘 대한민국에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도 총명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글도 잘 쓰고 지식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한지라 작가로서 자질이 충분해도, 그 성공의 가망이라는 게 지극히 희박하며 거의 운에 좌우된다는 걸 알기에, 설사 그런 재목이라도 인생의 이른 단계에서부터 다른 꿈을 꾸는 게 대부분일 겁니다. L은 아직 젊은 편이라고나 하지만, 그리고 영화산업 쪽에서 시나리오를 받아 줄 인맥이나 있다고 하지만(영화 산업도 어차피 모험 투기성이 강한 건 마찬가집니다. 레귤러 플레이어도 한순간에 망하는 게 보통인데 하물며), 작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 중에는, 이처럼 영업의 남는 시간에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길거리 캐스팅을 바라며 타자를 치는 강태공들이 제법 많을 것입니다.

L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첫째 정직하게 살아 온 사람이다. 둘째 글을 쓸 때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비록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자주 틀릴망정). 셋째 U같이 괜찮은 여자하고 제법 진도도 많이 나갈 만큼 그 인간성만큼은 진국이다. 넷째 부모님께 어떤 경우에도 손 안 벌릴 만큼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사람이다. 다섯째 사기꾼 선배한테 돈을 떼일지언정 못된 소리는 안 늘어놓는 신사다. 뭐 이 정도입니다. 그는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나의 부족한 점은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나, 나는 나의 진정성만은 누구에게도 안 밀린다고 생각하며, 세상이 나의 진정성을 알아 봐 주기만을 기대한다"는 소박한 희망을 밝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출판을 금전적 대박으로 속되게 연결시키지 않고, 사랑하는 여성을 외적 스펙으로 평가하는 가식이 끼지 않은 그 "진정성"은, 언젠가 세상 모두가 그 가치를 알아 줄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겉꾸밈이 아닌, 오직 "진정성"만으로 소통하는 그날이 빨리 오길 기대해 봅니다.

책 디자인이 예쁘고, 장정이 참 튼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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