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소나무 신부와 함께하는 마음의 산책
김대열 지음 / 푸른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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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영혼은 저속하고 품위 없습니다. 좋아하는 이의 행복을 빌어 주는 영혼은, 딱히 훌륭하다 칭찬을 해 줄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아마 선하고 무해한 존재일 것입니다. 나의 구애를 거절한 이의 행복을 끝까지 빌어주는 영혼은, 타인이 보기에는 안타까워도, 증오와 원한의 마음가짐을 끝까지 물리치고 멀리했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가상합니다. 육신과 영혼을 가진 모든 인간을 위해 그 행복을 기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종교적 성자입니다.

이 수필집은 일본에서 가톨릭 사제로 봉직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어느 신부님의 여러 단상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일본은 인구가 우리 남한의 두 배를 넘지만, 천주교 신자의 수는 매우매우 적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이 종교가 전래되고 유력 영주들도 개종한 바 있는데도 사정이 그러합니다. 신도 수에 비례해서 사제 지망생이 나오는 게 아니라, 평신도가 일정 규모 이하이면 아예 인적 자원이 없다시피한 게 그 실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자인 제가 모르긴 해도 아마 그런 이유로, 저자 김대열 신부님이 그곳에서 긴 기간 사목 활동을 하고 계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건 어느 나라건, 천주교 신자이건 아니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끼리 부대끼며 겪는 갈등이나 애정사는 서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가톨릭 사제, 프로테스탄트 목사님들, 불교의 스님들이 맡아야 할 중요한 직분 중 하나는, 그런 상처입고 혹은 방황하는 남녀노소 영혼들을 잘 인도하고 어루만지며, 바람직한 관계와 소통의 형성에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책, 장정이 예쁘고 볼륨이 생각보단 두꺼우며, 본문이 깔끔하게 편집-배치된 이 수상록은, 우아한 외관만큼이나 안온하고 속이 꽉찬 언어를 가득 담아, 읽어내려가는 중 마음의 평화가 절로 찾아지는, 담담하고 사려 깊은 고백과 술회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교만하게 굴지 말며, 더 근본적이고 넓디넓은 지혜의 바다 앞에 겸손할 줄 알자- 이는 각자 믿는 종교를 떠나서, 인지(人智)와 상식의 한계를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닐지요. 예수를 배반한 제자 유다는, 처음부터 인간이 악종이라든가, 혹은 물질 만능의 사고에 젖은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애초에 제자로 들이지도 않았겠거니와... 기록에 남은 그의 자취를 봐도 오히려 다른 11인보다 더 교육 수준도 높고 유대 지방에서의 평판이나 지위도 높은 편에 속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그가 왜 패륜을 저지르고, 누천 년에 걸친 악명을 쓴 존재로 전락했는가. 그는 나름대로 투철한 지성과 의기에 의해 행동하는 열심당원(젤럿)이었으며, 큰 기대를 품고 모신 스승이, 그가 처음에 상정했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했기에, 배신감과 상처를 다스리려는 의도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악하지 않은 동기가, 어설픈 지성과 판단과 결합"했을 때, 어떤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유다는 우리가 속단하듯, 그리 타락하거나 멍청한 위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다보다 더 똑똑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지성과 요량을 믿고 경솔하게 나선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더 파멸적일 수 있을까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한 신심 깊은 어른, 스승, 성직자가 꼬마에게 얼마나 큰, 바람직한 영향을 그 성장 과정에 끼칠 수 있는지 털어 놓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약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해서, 심지어 어느 베스트셀러 경제대중서의 제목까지 이 어구를 살짝 비틀어 채택했을 정도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주제로 어린이 연극을 꾸미는데, 목사님이 천주교 신자인 김대열 소년을 "착한 사마리아인 역에 캐스팅"한 것입니다. 소속 교파나 믿는 종교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좋아해주는 이웃이면 누구나 나의 형제라는 가르침을, 이처럼 명실상부하게 보여 주는 예가 또 있겠는가. 저자의 회고가 이렇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이, 근현대의 신구교 갈등에 비기기 딱 좋은 소재죠. 마치 2천 년 전의 그분이, 이후 이런 상황을 미리 다 내다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거나 아닌지, 거 참 읽으면 읽을수록 상황 부합이 신통했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이며, 부모이고, 이웃이더냐?"

저자가 일본에서 사역을 하다 보니, 이 책에는 그가 그간 만나 온 다양한 처지의 일본인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의지할 데 없는 노인, 가난한 계층, 장애인이나 중병 난치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사연은, 거의 한결같이 삶의 극한 상황에 몰려,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할 소수의 친우, 가족들과의 소통 안에서만 실낱 같은 희망을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가끔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디 중증의 장애가 있었던 데다, 뇌질환 등 신경계에서의 추가 발병 때문에, 거동은커녕 의식의 최소한 회복도 불가능할 만큼 상태가 나빠지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의료진도 손을 놓은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알아 보고, 입을 떼어 간단한 말이라도 하는 순간, 지인들과 주변의 분위기는 감동과 환희로 가득 물듭니다. 그저 숨쉬고 거동하고 감각하고 누군가와 함께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 가득한 상태인지, 이 책에 실린 여러 일화들은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이는 즉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각성이나 지혜가심심산중에 머무르지 않고, 탐욕과 악행, 기만과 증오로 가득한 풍진의 누리에서 실천의 기능으로 쓰이지 못한다면, 이는 돼지나 아Q의 눈멂, 사악함과 다를 바 없는, 극한 절망의 지옥에서 사탄의 졸개가 휘두르는 삼지창의 파편에 비겨 마땅합니다. 행동이 없는 지식, 나눔이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아무 미덕이 아니며, 가축이나 사기꾼의 과장되고 헛된 요설만큼이나 해악 가득한 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가장 낮은 이에게 베푼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라는, 이천 년 전 그분의 명징하면서도 준엄한 가르침을, 나와 이웃의 생활 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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