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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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주로 내 뜻한대로 뭐가 잘 안 이뤄질 때 그런 느낌을 갖곤 하지만, 애도 아니고 내 일 안 풀린다고 해서 그런 마음을 품으면 남 보기도 창피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별로 떳떳하질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이치가 원망스럽다 싶을 때 남 핑계를 곧잘 갖다 댑니다. "저 불쌍한 사람이 대체 뭔 잘못이 있다고 저런 불행을 겪어야 하나요?" 그게 사실 그 사람을 딱히 동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실패를 묘하게 명백한 불합리에다 끼워팔기하려는 이기적 속셈이기 쉽습니다.

 

존엄한 신이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방기하고 있으니, 이제는 어디서 악마의 도움이라도 빌려 와야 하겠습니다.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그 찜찜한 죄의식도 이렇게 해서 무마되고 달래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 나오는, 빌려준 원본 몇 백 배로 이자를 쳐서 받아가는 무시무시한 채권자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덩치도 크고(?) 말도 잘하고 빈틈도 없는(빈틈이 있으면 그게 과연 악마인가요?) 그런 진성 사탄이 아니라, 몸도 쬐그맣고 아첨에 잘 넘어가고 정서적 약점도 있고 허술함 투성이인데 능력만 전능에 가까운(전지까지는 아닌가 봅니다. 모르는 게 많더라구요) 그런 악마가 있다면, 그건 가까이에 두면 왠지 재미도 있고 여기저기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존재는 사실 그냥 고마운 친구지 악마까지 가지도 않아서 나중에 된통 당하겠다는 우려도 없고요.

 

괴테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천재들의 성취 비결을, "데몬(디먼)의 장난"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천재나 위인의 관찰자가 아니라 본인 자신이 천재였으니만치 이 말에는 그저 "영감(inspiration)"의 문학적 비유라든가, 장난, 희언 비슷한 게 아닌 어느 정도 진정어린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몬"이 그 일을, 알고보면 대신 해 줘서 그렇다는 겁니다. 괴테는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 완고했던 골수 가톨릭을 신봉한 고장에서 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사람인데도, 이런 이교적인 믿음에 기울길 별로 꺼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건 짖궂은 장난도 치지만 이처럼 인간에게 친숙한 존재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고지식하고 광신적이며 융통성 없는 태도는 이런 것들을 싸잡아 "이단"으로 몰 수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이런 일체의 초자연적 존재(혹은 개념)에다 "악마"라는 부정확한 범주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겠죠. 아자젤이 "악마"라는 부당한 이름을 지닌 건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아자젤은 못 하는 게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수괴 노릇을 하는 더 큰 악마에게 무슨 능력의 일부를 빌려 온다든가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좀 귀찮고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자기 힘, 정상적인 능력 발휘로, 우리 인간계의 꼼짝 않는 질서를 변동, 교란시킵니다. 이 역시 물리법칙(이게 아자젤의 그 세계도 지배하나 보죠?)의 한계와 예산에서 벗어나지 않아, 요술방망이로 뚝딱 해치우는 식이 아니라 과학적 계산을 통해 조지(주인공입니다) 아저씨(이런 악마를 믿거나 들고 다니기엔 나이를 엄청 먹은 할배입니다)의 얼토당토않은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자젤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지만 재능의 행사에 까탈을 안 부리는 걸로 보아, 자기가 속한 세상에선 그게 별것도 아닌 형편인가 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가장 평범한 수준이나 평균 이하)도 그쪽 동네에 가면 뭔가 톡톡한 쓰임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안기지만, 아자젤이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그르치는 모습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걸로 보아, 우리 인간은 이놈의 감정 조절 무능력 때문에 결국 저쪽에 가서도 별 힘을 못 쓰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이 18편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자젤이 애써 이뤄준 "기적들"은, 결국 은혜를 입은 인간들의 배은망덕이나 감정적 오용 때문에 실패나 재앙으로 끝나고 맙니다. 요는,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해 봐야 인간 존재 자체에 내재한 모순과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도루묵"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신랄한 냉소나 블랙 유머는 이 주제의 생생한 구현에 이렇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아시모프는 SF를 쓸 때 미사여구나 문학적 기교를 엄청 자제하는 편입니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문장, 아니 초등학생이나 읽으라고 쓴 듯한 문장 때문에 처음에는 그 위대한 고전의 수준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빚어질 정도죠. 그러나 이 소설은 거의 서거를 몇 년 앞둔 시점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했는지 증거라도 보여 주겠다는 듯, 미칠 듯한 유머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한 말장난으로 가득합니다. 아자젤 이야기보다 1인칭 화자와 조지 영감 사이의 대화가 너무 웃겨서 책 진도가 안 나갈 지경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알고보면 그 방대한 지식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즉, 재미가 없습니다) 동원하는 반면,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 뻬어난 두뇌로 일생 동안 섭취한 지적 자산을 갖고 유쾌하게도, 어린아이처럼 즐기고 놀고 있습니다. 에코의 저술에서 은근 반유대주의 냄새가 나는 건 이 선배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탓도 있다고 저는 짐작합니다.

 

아시모프는 뭔 이유인지 주인공 조지를 통해 셀프 디스 개그를 이 단편들에서 쉴 새 없이 구사합니다. "한 번 강연에 몇 천 달러를 대가로 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죠? 공짜로 시작한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에게 당신이 '이제 몇 천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이 강연을 계속 이어가버리겠어!'라고 협박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폴로 13호가 사실은 여행 중독자 한 사람을 태우고 달나라로 그대로 가 버렸다는 미친듯 웃기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원더링 쥬(방황하는 유태인)"까지 슬쩍 끼워넣고 있습니다. 만약 아시모프가 유태인이 아닌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엄청난 물의가 빚어질 소지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가 하면 웬 할아버지가 Y담을 이렇게 좋아하나 싶게, 성적인 코드가 물씬 묻어나는 제법 위험 수위에 도달한 개그도 많이 나옵니다. 처음 절반은 다분히 교훈적이고 소프트 SF스러운 이야기가 많은데, 나중에 가면 작정하고 개그를 치겠다는 듯 아무도 못 말릴 난장판(그러나 지적인)으로 흐릅니다. 특히 <갈라테아>편은 읽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면 내용 이해를 못 한 것이니 다시 잘 살펴 보십시오.

 

살다보면 짜증이 날 때가 많습니다. "이 빌어먹을 신호등은 내가 오기만 하면 full로 빨간불이야!" 그래서 내 주위의 엔트로피를 일괄적으로 낮춰 놓았더니, 그 정연한 질서 때문에 삶에 분노할 일이 없어 자극이 없고, 자극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 결국 두뇌가 퇴화하더라는 겁니다. 무질서에 감사할 줄 알고, 빈곤에 고마운 줄 알아야 제 인생이 풍요와 보람으로 가득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박식할 뿐 아니라 세상 이치에 달통한 노인 아시모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그래서 전능하지만 전지하지 못한 말썽꾸러기 아자젤보다, 혹은 도라에몽보다, 부족한 우리네에게 더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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