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 기름붓기 열정에 기름붓기
이재선.표시형.박수빈.김강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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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란 양날의 칼과도 같습니다. 바람만 잘 맞게 불어 주고, 그 향하는 시선만 올곧게 뻗어 준다면, 이 열정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도움을 줍니다. 둘 중에 어느 한 목표만 이룬다면, 쾌락과 공리(功利) 중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할 수도 있는데, 열정은 두 토끼를 모두 손 안에 쥐게 도와 주기도 합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열정은 진정 소중히 여겨야 할 게 그걸 가진 자신도 자신이지만, 보고 있는 타인들도 "이거 괜찮겠다" 싶으면 옆에서 부채질을 살살 해 줘야 합니다. 그게 영리한 선택이자 일종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청춘들의 딱한 모습을 보고, 어느 시대보다 소중한 열정을 불사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시대에 태어난 그들을 위해, 제발 활활 좀 불타오르라고 부채질을 하기 위해 모인 분들이 이재선, 표시형, 박수빈, 김강은 네 분입니다. 부채질을 하는 손, 팔이 피곤할까봐, 혹은 부채질 받는 쪽에서 미적지근해할까봐, 양, 질 면에서 무시무시한 화력을 지닌 기름통도 피처링해 왔습니다. 정여울, 진중권, 고병권, 장석주 네 분입니다. 이 정도면 참, 설사 냄새 나고 여기저기 썩은 사회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가진 열정을 다 던져 버리고 메마른 먼지가 되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조차 남기기 싫었던 청춘들이, "아, 이럴 게 아니었어!"라며 심지에 재 점화를 시도하기 충분합니다.




하긴 어느 시대 청준들인들 열정 없는 쭉정이로 살았겠습니까. 평균 수명의 소장(消長)에 따라 중노년이야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었지만, 청춘은 어느 시절 사람들이나 열여섯에 피어나 십여 년 개화하다 봉우리를 서서히 닫지 않습니까. 청춘은 그래서 신이 빚었던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 온 선물입니다. 길어야 할 것은 인생 자체가 아니라 청춘입니다. 청춘이 아직 우리 의사대로 길어질 순 없기에, 그 대용물로 우리는 열정이라도 키우려고 합니다. "젊음은 그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의식, 의도하는 만큼만 정해진다."는 말도 있지만, 청춘이 우리의 의도에 따라 뭐가 좌우되는 바가 있다면, 통제 가능한 유일 변수는 바로 이 열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열정이 있는 한 그는 청춘"이란 말은, 정말 열정이 남아 있는 이상 초라한 자위는 결코 아닙니다.



 


한 마리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 다른 무리들도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레밍이라는 쥣과 동물이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참 자연이란 랜덤의 허수아비극을 자주 펼치고, 적자 생존이니 뭐니 하는 진화의 원칙(?)이 아무 의미 없이 빈 것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아니다 싶어도 네 갈길을 가라. 남들 따라 무작정 죽을 길을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습니다. 사실 정말 무서운 생각은, "내가 가는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란 자각이 아닙니다. "나만 빼고 어떻게 저들은 모조리 죽을 길로 돌진하고 있을까?"란 생각, 이 세상이 저주 받은 곳 아니냐는 느낌입니다. 노인들 하는 말 중에 "모두가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다"는 게 있죠. 물론 여럿이 합심하면 한국전 같은 큰 재앙도 쉽사리 패닉에 빠지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그 세대에는 "그저 대세를 따라가는 게 장땡"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후자의 의미가 더 지배적입니다. 자소서를 써도, 스펙을 쌓아도, 남들 하는 대로만 그대로 따라하니, "할 만큼 했어"라며 마음은 편할 수 있지만, 과연 인사담당자의 눈에 찰 확률이 높아지겠습니까? 그건 "회사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아니라, "회사에 떨어지고 나서 마음이 덜 아프려는 노력"입니다. 할 만큼 했는데 안 되었으니, 그저 운이 나빴다고 값싼 위로를 삼으려는 동기 뿐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설사 입사에 성공해도, 그게 좋은 직장이 되기 힘들 뿐 아니라,  회사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받은 채 승진도 안 되고 매일매일 간신히 연명이나 하며 독서로 현실도피나 하는 루저밖에 못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여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창의적 방향으로 "튀어야"만 남들이 봐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 자신이기만 하면 되는 분위기"를 강력히 방해하는 게 있습니다. 이미 사회에 팽배한(저자들의 표현입니다) "성과주의"가 그것입니다. 성과주의는 남들의 시각으로 나를 판단하게 만들며, 그 남들 역시 다른 남들의 시각에 의해 판단하게 하는 무서운 감시, 소외의 기제입니다. "이러니 누가 밤에 불안해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책 저자들이 내리는 진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자들은,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기준점을 나 자신으로 잡는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사회에 반항하고 부정하라는 주문도 아니고, 근거도 없이 자기만족적 행보로 날뛰라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왔다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기에 충분히 자격 있는 인생 아니냐, 이런 뜻에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종착 없는 레이스에 지친 당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30개의 아포리즘과, 그 아포리즘을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한 사진, 아포리즘만 갖고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 못할 독자들을 위해, 아포리즘 못지 않게 아름답고 호소력 강한 언명들로, 각 챕터들은 채워져 있습니다. "피처링된" 네 분은 (좀 더 작은 글씨로) 잔잔한 에세이, 그러나 마음의 공명을 강력히 타종하는 격려와 충고로, 슬슬 불꽃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는 열정의 요람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어쩌면 딱히 목적과 지향이 없다 해도,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게 열정과 불꽃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물며 그에게 뚜렷한 비전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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