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열정과 열의는 우리들 성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을 없애면 기본 자체가 없어져요."
"그런 건 믿지도 않습니다. 불치의 증상이냐구요? 아뇨. 치료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요? .... 하, 그건 다 개소리란 말이요!"
-프란츠 그린바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인재들을 찾아내라고 했지만,
자네가 내 그 말을 그렇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윈스턴 처칠

"군(軍)에서 천재들을 모두 모았다...라...
혹시, 그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디지털 기계, 그게 뭐지? '디지'는 숫자를 의미하고, 디기투스는 손가락을 꼽아 센다는 의미이기는 해.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 실력이 아직은 쓸만하군. 하지만 '디지털'이라니,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스포츠맨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튜링은 좋은 사람이다. 게다가 튜링은 죽기까지 하지 않았나. de mortuis nihil nisi bene! 죽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
-레오나드 코렐

"수학자가 기계에 관심을 가지다니 대단하구나. 보통 수학자들은 공학을 경멸하거든. 수학을 '무용(無用)의 예술'이라고 부르면서 말야. 예술 지상주의자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밤에는 일식을 제대로 볼 수 없지 않겠니?"
-빅토리아 카슨(한 번도 결혼하지 않아 처녓적 성(姓)을 늙어서까지 유지한, 레오나드 코렐의 이모)

"호모들은 모조리 빨갱이라고 생각하면 돼. 남자하고 같이 잘 정도로 타락했는데 뭔 짓인들 더 못하겠나? 당연히 적과도 그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 찰스 해머즐리

"진실은 우리에게도 어려운 과제야. 진실을 밝혀내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다뤄야 하니까."
"코민테른은 호모민테른이라고. 누가 스탈린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더 호의적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나 보지."
- 로버트 서머셋

"수학자는 쉽게 나이를 먹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어."
"앨런은 예리했어. 끈질기게 비트겐슈타인에게 도발했지. 나중에는 그 늙은 제왕도 그를 좋아하기는 하더군."
-프레데릭 크라우스


"모순 없는 남자는 믿을 수도 없는 남자다."
-제임스 코렐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빅토리아 카슨, 그리고 자기 이모의 말을 무단 도용하는, 어려서부터 남의 명언 끌어대기를 즐긴 레오나드 코렐

"기계는 영혼 없이 철컥거리지만, 영혼 있는 내용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제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절대적인 게 아니었으니... 아무리 오랜 동안 진리로 믿어져 오던 것도, 진리가 더 이상 아니거나 진리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로빈 갠디

"저자들 전문가들, 학자들이란 자들이 하는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단다, 얘야."
-(또) 제임스 코렐



" 미스테리는 그 해답보다 위대하다"는 명언에 작가분이 충실히 공감한 탓인지, 이 소설 끝까지 읽어 가 봐도, 튜링이 왜 마지막 순간 청산가리가 가득 발라진 사과를 먹고 죽었는지, 그 경위에 대한 해답은 시원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결론의 명확성 여부와 무관하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튜링의 죽음으로부터 32년 후, 육십을 넘긴 노인이 된 레오나드 코렐이, 기념 세미나에 참석하여 그의 최후를 수사한 경관으로서의 체험을 술회하고, 애플 社의 로고 창시에 얽힌 "전설"을 가당찮다는 듯 통박하는 장면은 눈가를 시큰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 직전 장면, 혈기 왕성한 청년 경장으로서, 경찰 총수의 위선과 무지몽매함에 한없는 거부감을 느끼고, 소중한 자신의 경력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 직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후련함과 통쾌함을 안겼을 줄 압니다.



소설은 매혹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소설의 제재가 된 어느 수학자의 생애 자체가 그러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사고 기계"를 처음으로 창안한 앨런 튜링의 천재성, 그 천재의 비극적 생애에 담겨 현대에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담론의 빌미를 제공하는 "동성애 스캔들", 현재까지도 숱한 음모론의 발단이 되고 있는, 그 죽음의 미심쩍은 경위.... 사실 튜링의 2차 대전 당시 공헌은 세계 역사 전체를 바꿔 놓았으며, 제아무리 대영 제국과 미국의 물량이 좋았다 해도, (이 책에 나오는 대로) 함대가 바다에 나가는 족족 U-보트의 공격에 침몰된다면 무슨 수로 버텼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두고, 단지 "신뢰 불능"이란 이유만으로 전후 포상에서 푸대접하고, (그 무수한 음모론의 발원이 되었듯) 국가 안보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일 만큼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한 그. 사실 JFK 사건 수사를 맡은 짐 개리슨도 어느 화장실에서 동성애자 누명을 쓰고 매장당할 뻔했고, 파솔리니 역시 10대 소년에게 수작을 건 게 빌미가 되어 집단 구타를 당하고 죽었죠. 체제에 위험이 된다 싶은 인물들이 의문사, 혹은 그럴 뻔한 위험에 처한 건 역사가 제법 오래된 사실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튜링이 아닙니다. 튜링이 후반부에 지인들 회고 형식으로 잠시 나오기는 하나, 소설의 시선과 화법을 이끌어가는 이는 20대 후반의 젊은 경관 레오나드 코렐입니다. 튜링을 제재로 삼은 소설들이 보통 취하는 태도인데, 튜링의 일부를 닮은 분신이다 싶은 젊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니더군요. 레오나드 코렐은 튜링과 많이 닮았지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튜링처럼 그도 번듯한 가문 출신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체제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권위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감추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태도를 무척 경멸하며 자신의 양심과 감정에 충실합니다. 반면 다른 점도 많은데, 수학을 좋아하고 똑똑하긴 하나 튜링처럼 천재가 아닙니다(이런 쓸데없는 소릴... 대체 누가 튜링처럼 천재일 수가 있을까요). 결정적으로 코렐은 동성애자가 아니고, 못된 남편을 만나 불운한 처지에 빠져 딸 하나를 어렵게 키우고 사는 줄리 매시라는 혼혈 미녀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입니다. 튜링과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리 미남이라 보기 힘들었던 튜링과 달리, 주인공 레오나드는 손눈썹이 길고 팔다리가 가늘며(본인은 이게 콤플렉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겼다는 점입니다(이 말은 전혀 암시가 없다가 비밀 요원 뮬런드에게 구타당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물런드는 그저 레오나드가 잘생기고 젊고 머리숱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직무를 빙자하여 개인적인 증오심을 불태우는데, 이 설정은 권력의 맹목성과 폭압성을 상징합니다).



레오나드의 상관들은 동성애에 대해 지독한 경멸과 적개심을 지니지만, 마땅한 근거를 갖고 그런 행동과 감정을 갖는 건 아닙니다. "거 생긴 거만 봐도 딱 느낌이 오지 않아?" "그러면 해머즐리 총경님은 어떠신가요? 그분도 외모가 여성스럽지 않습니까?" 권력 관계의 냉혹한 기제 앞에 무한히 비겁해져야 하는 로스는 이 한 마디에 소신(?)을 바꿉니다. "아하하, 하긴 그렇기도 하지 뭐." 상관의 입을 단 한 마디로 다물게 하는 이 재주에, 레오나드 코렐은 진정 자신이 천생 이야기꾼 제임스 코렐의 의심할 바 없는 아들임을 확신하지만, 자괴감과 열패감은 더욱 커집니다.

레오나드 코렐은 수학적 소양이 상당했기에, 수사를 진행해 가며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고 이해합니다. 크게 두 가지, 즉 "자기 지시(self-reference)의 역설"과 "모든 메시지의 정연한 부호화, 알고리즘화"의 이슈가 관심 대상입니다. 스스로의 진리치를 부정하는 명제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이를 기계로 만들면 그 기계는 연산 오류의 무한 반복에 지쳐 자폭을 하고 말 것인데... 이런 자기 부정 역설의 서글픈 운명은 레오나드 코렐을 오랜 시간 괴롭혀 온 문제, 그리고 상처 투성이인 그의 내면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남자치고 볼륨이 큰 엉덩이 때문에 "계집애 같다"며 놀림감이 되었기에,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남성성을 세상을 향해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말은 번드르르했으나 실천이 전혀 따르지 않았던 부친 탓으로, 대대로 물려 받은 재산과 가문의 위신이 사멸해가는 과정을 어린 시절 지켜 봐야 했던 악몽 때문에, 그는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허풍과 가식을 누구보다 혐오합니다. 여기에, 자신에게 냉정히 굴었던 어머니에 대한 살갑지 않은 기억까지 있어, 전문가들이 흔히 범주화하는 (이 "범주"라는 게 얼마나 토대가 허술한 허상인지요! 책에는 버트란드 러셀의 일화,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업적 소개를 통해 잘 나와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될 조건"들을 모조리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동성애자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 여기는 누구보다 진취적이었고 교양 넘쳤으며, 거침 없는 행동주의자였지만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던 비키 이모의 도움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남성성을 최종적으로 확정 체화하는지는 이 소설의 결말에 잘 나옵니다.

이 소설엔 안 나와 있으나,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에니그마>(이 책도 한국어판을 조영학씨가 번역했습니다)에 잘 나와 있는 게, 독일군(특히 독일 해군)에서 운용했던 가공할 암호 체계(혹은 그 단말기)의 결정적 허점이, 바로 "어떤 키도 자기 자신(의 참값)을 찍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은, "자기 지시의 역설"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 줍니다. 소설에서 아버지 제임스 코렐이, 용의 입 안에 손을 넣고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는 그 말은 (비키 이모와 레오나드가 실컷 비웃는 것처럼) 물론 제임스 코렐이 고안한 게 아닙니다. 논리학 교과서나 대중서에 보면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악어" 혹은 "사형수를 처형하려는 왕" 등으로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가진 유명한 이야기죠. 튜링은 자신의 기계 설계에 의도적으로 난수 체계를 삽입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아무리 무결점이고 정연한 궤도라도 그 정해진 코스만 반복하면 결국 시스템이 부패, 퇴화한다는 생각에서라고 합니다. 때로는 돌출 분자, 파격이 있어야, 발전이 있고 진화가 있다는 건데요. 이는 뭐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조국을 패전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자신 같은 천재가 웅변으로 입증하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배비지, 홀러리스, 노버트 위너 등 개론 수준의 전산학 책에서 자주 접하는 인명들이, 이 소설에선 고유의 맥락 속에 자리를 잡아 독자들에게 생생한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매카시즘 관련 잠시 언급되는 "라벤더 스케어"에 대해선 이 링크를 참조하십시오. 시스템을 지키려는 자가 결국 가장 앞서 시스템을 파괴하고 만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신적 대모로 등장하는 비키 이모는, 틈이 날 때마다 그런 말을 합니다. "제임스 코렐은 언제나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대했다. 제임스 코렐의 아들인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오늘날 아이들조차 일상의 장난감처럼 갖고 놀게 된 사고기계, 동시대인이 그 개념조차 찹지 못했던 시절 선구적 안목으로 이를 창조한 어느 천재, 사실 그도 학창 시절 크리스토퍼라는 어느 아름다운 소년, 육안으로 대낮에 금성을 볼 수 있었다는 신비로운 천재에 의해 일생의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소년 자신은 10대 때 요절). 사랑과 이해가 없는, 돌출 분자에게 냉혹한 퇴장을 명하는 단색의 자연계는, 언제나 그 자신 역시 반드시 자살로 끌리게 되어 있다는 결론을, 이 유려한 소설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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