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삼각형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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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p de fleurs, madame, n’en jetez plus!
(꽃이 너무 많아요 부인, 더 이상 던지지 마세요!)

 

 

이 장편은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이 배경입니다. 도입부가 꽤나 충격적인데, 마치  007 시리즈 첫째 편인 "닥터 노"의 인트로를 보는 듯합니다. 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려 싸우다 불구가 되었다고는 하나, 멋쟁이들만 활보하는 파리 시내에서, 한쪽 팔이 없는 사람,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 얼굴 일부가 날아가버린 사람 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으면, 그 모습은 참 그로테스크할 것입니다. 착한 독자인 우리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 만약 한국국적이기라도 하면 "저분들 아니셨으면 우리는...." 같은 경외어린 시선을 갖고 그들을 보았겠지만, 경박한 프랑스인들, 그 중에서도 파리의 아가씨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참에, 어느 미인, 차림새는 수수하나 동작과 실루엣으로 미루어 꽤나 미인일 것 같은 어느 여성이, 괴한들에게 자동차로 납치를 당합니다. 더 놀라운 건, 저 상이군인들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재빠르게 행동에 들어가, 그 여인을 구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전직 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 몸놀림이 성치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기민한 반응이 나오며, 이런 일사불란한 작전을 지휘하는 이는 또 누구일까요? 백주 대로상에서 여인을 납치하려 했던 자들은 그 정체가 또 무엇이며 말이죠. bunch of wonders라 부를 이런 빼어난 테크닉은, 이후 같은 장르의 여러 작품들에서 후배들에 의해 되풀이되겠죠.

 

이런 기이한 장면을 잘도 시각화하는 르블랑의 재주는 이미 앞 작품들에서 여러 번 본 바 있습니다. 6권의 세번째 단편 <그림자...>가 그 좋은 예입니다. 너덜너덜 옷을 기워입은 사람, 그나마 멋 좀 낸 사람, 늙은이, 꼬마, 아가씨,.. 도저히 같은 동아리로 엮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해마다 같은 날, 폐쇄된 어느 부지에 모여 우물을 들여다 보거나, 땅을 헤집거나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날이 저물기 전 한탄을 쏟아내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젊은 여인이 일장 연설을 해댑니다. 사연을 모르면 이보다 더 괴이쩍은 풍경이 없습니다. 르블랑은 이처럼,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이미지들을 모아 극적으로 모자이크하여, 독자들 앞에 이야기의 서두로 척 꺼내어 놓는 기막힌 장기가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파트리스 벨발을 꼽아야겠습니다만, 처음에 단단히 한몫 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코랄리 엄마"가, 1부 이후로는 무대에서 모습이 뜸해지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 물론 힘 없는 여인의 몸이고, 간악한 악당의 손에 납치되고 감금되느라 그렇긴 합니다만... "엄마"는 물론 누군가의 모친이라는 뜻이 아니라, 젊은 간호사 코랄리를 친근하게 부르는 환자, 병사들로부터의 애칭입니다. 만약 나이 지긋한 간호사라면 mere라고 불렀을 텐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maman이라고 한 겁니다. 코랄리는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 정도인 것 같고, 병사들도 대개 그 또래거나 더 많은 게 보통이죠. 주인공 파트리스는 서른이 넘었지만 그를 maman이라 부르는데, 우리말 "엄마"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이건 성귀수 선생님도 이 표현을 쓰고 있던데, 느낌이 어색해서 좀 다른 대안이 없을지 번역가들이 연구를 좀 했으면 합니다.

 

아무튼 파트리스 벨발은 애국심 강하고 투지와 열정에 불타는 사람입니다. 한쪽 다리를 완전히 잃고 의족을 단 사람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코랄리에게 구애를 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너무 자신감 넘치게 코랄리에게 수다스러울 만큼 들이대는 모습은 약간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코랄리는 알고 보니 유부녀였고, 그 남편이란 자는 나이도 많은 데가 인상이 아주 고약한 자였습니다. 게다가, 그 착한 코랄리는 그 남편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고도 별반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파트리스는 이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자 그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동선과 심리를 ㄸ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같은 느낌입니다. 이야기를 이처럼 뒷부분이 자꾸 궁금해져서 페이지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야말로 정말 경탄스럽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 전개도 물론 재미있습니다. 결국 이 장편도 뤼팽이 나와서 해결해 주는 구조인데요. 재미있는 건 둘째치고, 사실 에사레스란 자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부터 이미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이 되었습니다. 이 트릭은 전에 한번 나오기도 했고, 뤼팽의 열렬한 팬이라면 대체로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는지 감이 잡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골육상잔이라는 끔찍한 패륜이 절대 작품에서 용납 안 된다는 건 6권의 <배회하는 죽음>에서도 보여진 바 있습니다. 시계의 트릭 역시 처음 보는 속임수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악당으로는 에사레스라는 터키인이 제시됩니다. 투르크는 1차 대전 당시 동맹국 편을 들었는데요. 책에서 반독 요소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아마 프랑스 입장에선 예상치 못했던) 이 동방의 늙은 대국이 취한 선택에, 애국심 넘치는 작가 역시 어지간히 분개한 것 같습니다. 반면 그리스에 대해서는, 시대착오적 낭만주의를 가슴 가득 간직한 르블랑이어서인지, 꽤나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바이런 경 등을 떠올려 보십시오). 소설 중에 나오는 배 이름 중에 "벨 엘렌"이 있는데, 이게 바로 Belle Helene,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미녀입니다. 그리스풍 조각상도 소설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스포일러라 여기 적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예비역 군인이 나와서 저는 이 사람도 뤼팽의 분신일까 생각했는데, 아무렴 다리 하나를 자르고 그런 변장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겠죠. 6권에 보면 "퇴역 군인 자니오"란 이름으로 뤼팽이 나오는데, 애써 도와 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이래서 하층민 따위에게 함부로 선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암시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작품 읽은 분들 중에, 어째서 뤼팽이 그리 순순히 물러났는지 의아했을 수도 있는데요(뤼팽이 아직 유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 시절인데). 아무리 공증인이 개입해서 작성된 계약이라고 해도, 이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원고, 피고 모두 실존 인물이어야 합니다. 소송이 유지되기 위한 대 전제입니다. 실존 인물이 당사자가 아닌 소송을 "허무인 소송"이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일련번호가 개개인에게 발급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 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이슈지만, 다른 나라라면 사정이 그렇지 않죠. 계약 내용이 진정성을 갖추어도, 원고가 실재하지 않는 이라면 그 소송은 원천 무효입니다.

 

뤼팽도 여기서, 진짜 예비역 장교에게 "배신행위"를 당합니다. 그러나 뤼팽이 누굽니까. 아마 이 작품은, 읽는 독자들에게 결말에서 가장 후련하고 통쾌한 방법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체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처럼 도중에 진상을 다 짐작한 독자도, 대단원에서는 그냥 뭐 묵은 체증이 다 가시는 느낌이었으니... 청춘 남녀(남자가 약간 나이가 많긴 하지만)도 부모대부터 못 이룬 사랑을 이루고, 전황은 우리 모두의 조국(뤼팽을 읽는 동안에는 모든 독자는 프랑스인이 됩니다!)을 위해 유리하게 돌아가니 말입니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프랑스 수상 "발랑글레"는, 아마 제 생각에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한 수완가이고,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기도 하며, 노벨 평화상도 받았지요. "유럽 최강대국"이 연합국 대열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는 서술이 있는데(이 나라가 돈을 조건으로 흥정한다는 야비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가 양해하건 안하건 무관하게 참전은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으나,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오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문은 la dernire des grandes puissances europennes인데, "유럽의 마지막(=최후로 남은) 강대국"이지 "최강대국"은 아닙니다. 최강대국은 당연 영불독 외에 누가 있습니까? 일찌감치 그들은 교전 당사자였고요. 여기서 이름이 안 나온 채 은근 암시만 되고 있는 이 나라는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는 "열강"이기는 하나 최강대국은 아니죠. 1915년에 삼국 동맹을 깨고 독-오의 뒤통수를 쳤으니 이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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