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의 고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6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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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10년 전 성귀수 선생님 번역으로 이 단편집을 처음 읽었고, <수정마개>나 <813>처럼 어려서 읽었던 장편들은 (두번째 만남인)당시 대충대충 넘기거나 아예 안 읽은 반면, 정말 처녀독(讀)으로 만나는 이 작품집은 그때 아주 집중해서 정독했더랬습니다. 그래서 10년만에 다시 읽어도, 구체적인 부분까지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더군요. 물론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거울 놀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상이 정반대라는, 도일 경 이래 추리 장르 단편에서 아주 즐겨 쓰이는, 고전적인 설정트릭이 잘 활용된 작품입니다. 다만 거울로 보내는 신호(그닥 참신하지 않은......) 타령과 약간 억지스럽게 결합되었다는 게 아쉽죠. <수정마개>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서의 트릭을 오마쥬했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창의를 끼워 넣었던 데 비해, 이 단편은 선배 거장들의 솜씨를 뤼팽 버전으로 "번역"한 데에 그쳤다는 게 찜찜하게 남습니다. 요 구조는 이 책의 일곱 번째 단편 <백조 목의 에디트>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 변주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결혼반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이 찌면 반지가 잘 안 빠지기 때문에, 기술자를 불러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정(不貞)을 저지른 걸로 치명적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그저 부부 사이의 사소한 다툼(당사자에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겠지만)에 불과한 사정에도 뤼팽은 성심을 다해 개입, 가장 말끔한 솜씨로 일을 처리해 냅니다. 트릭의 정교함으로 따지자면 어이없어할 독자들도 많겠으나, 저는 이 단편이 "뤼팽다운 솜씨"가 간단하면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숙녀의 곤경은 어떤 때라도 모른체하지 않는다는 뤼팽만의 매력, 신사도가 잘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아르센 뤼팽의 결혼>은 미스테리 단편으로 뻬어나다기보다,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뤼팽의 면이 잘 드러난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특히, 못생긴 노처녀도 기꺼이 사랑해 줄 수 있고, 그녀의 착한 마음 앞에 도둑으로서 크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의 태도가 약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포탄 파편>에 "드 호엔촐러른(de라니! 세상에...)"이 나오듯, 이 단편의 주인공은 구 프랑스 왕가 방계 혈족의 초 고위급 신분들입니다. "바렌의 도주"란 위트 넘치는 명명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환기합니다.

 

뤼팽의 설정은 결코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기는 패륜적 설정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배회하는 죽음>은 그래서 으시시하면서도, 결말에 가서 독자들을 (르블랑 자신이 익히 써 오던 방법으로) 안심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 착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집은 전작과 달리 배경이 다시 파리로부터 시골로 옮겨 왔다는 게 또 하나의 특징인데요. 소속이 지방 경찰청이 아닌데도 시골이 무대가 되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는 가니마르가 2, 3권에 이어 또 등장합니다. <붉은 실크 스카프>는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시골이 아닌 도시가 무대로 되어 있는데(일어난 범죄도 지극히 도회적 성격을 띱니다), 가니마르는 상관으로부터 "자네 경력 중 최고로 멋진 해결 아닌가!"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습니다. 사실은 뤼팽이 다 처리해 주었으니, 갖고 놀린 거나 마찬가지인 가니마르로서는 치욕에 불과하지만, 시민의 공복으로서 본분에 충실한 그는 여튼 까다로운 범죄 하나가 해결되어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악랄한 함정>은 그들이 판 함정이 악랄하다기보다, 시시한 악당을 타깃으로 삼고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뤼팽의 한심한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이 단편뿐 아니라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기암성> 이전 뤼팽의, 아직은 서툴렀던 리즈 시절에 벌어진 것들이라고 뤼팽 자신이 "나"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인적이고 시원시원한 활약상보다, 팬 입장에서 뭔가 안타까운 느낌을 조금은 들게 하는, 시행 착오적 성장기의 모험담 같은 인상도 적지 않게 줍니다.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느낌은 대단히 옅어집니다만. 특히 이 단편은, 마지막에 밝혀지는 수수께끼의 진상이 너무 어이없어서, 독자들이 다소 얼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장르의 규칙에 지나치게 속박받지 않고 주인공의 매력(?)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이 작 역시 마음에 듭니다.

 

성(性) 구분의 모호성 모티브는 뤼팽 시리즈 중 처음으로(아니구나.. 두번째지만 그 얘길 구체적으로 하면 안되겠습니다) 나오는 건데요. 정작 뤼팽이야말로 그리 장신도 아니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라는 점에서 여장이 제격인 조건이지만, 한 번도 여태 그런 모습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미남의 팔자란...!" 같은 자부심 넘치는 개탄(?)은, 성귀수 선생님 책에서 더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확실히 이 코너스톤 판이 깔끔한 텍스트에 휴대하기 좋은 외장이라면, 성귀수 선생님 책은 역자만의 구수한 문장 그 맛이 느껴지고, 소장 가치가 있는 제본이라는 점이 좋습니다.

 

<허수아비>는 제목이 스포일러죠? 하긴 스포일러를 스포일러라고 떠든다는 자체가 스포일링이기도 합니다만... 제목도 스포일러지만 범인(...)이 도피 중 가장 절실한 난관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 트릭까지 다 밝힌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적인 내용 누설입니다. ftu de paille에는, 이 두 가지 뜻이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영어의 straw와 같습니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르블랑 자신이 이미 실수를 한 것입니다. 아 작품에는 번역어가 약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gendarmes는 성귀수 선생님 책부터 대개 "군경"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시골에서 치안 행정을 맡기기에는 민간 경찰 조직이 아직 미비했던 시절이라, 군대가 경찰 기능까지 겸하는 제도입니다. 이걸 한국어로 "국가 헌병대"라고도 옮기는데, 그건 표현이 대단히 부정확할 뿐 아니라(그럼 헌병대가 다 국가 헌병대지 민간 헌병대도 있습니까?), 이 뤼팽의 작품이 쓰여지던 시절 일제 강점 체제 하에서 헌병 경찰의 무단 통치를 받았던 우리의 실정이 떠오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gendarmes는 군내 범죄와 기강을 다루는 "헌병"과는 다른 제도요 개념입니다. 이 책에서는 중반까지 "헌병"이라고 계속 옮기다가, 종반 들어서 다시 "군경"으로 갈아타고 있습니다. 2,3권 내내 이 코너스톤의 태도는 "군경"이었구요. 참고로, 이 "군경"도 무슨 무장 공비 침투시 군-경 합동 수색 같은 용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이때는 별개 조직이었던 군과 경이 joint를 이룬다는 뜻이지, 군이 경을 겸한다는 게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한국은 영토의 어떤 일부도 군대가 그 치안을 유지했던 역사가 없습니다. 계엄령 선포시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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