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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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Huit Cent Treize>이므로, 우리말로 읽을 때는 "팔백 십 삼"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팔일삼"이라고 발음하면, 여튼 뭔가 좀 더 내용 누설을 하는 셈이 되겠는데,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고지식하게 십진법대로 읽으면, 진상이 좀 더 감춰지는 느낌도 듭니다. 어차피 독자가 풀 수 없기로는 매한가지고, 르블랑도 이걸 의식했는지 "만약 답을 알고 나면, 세상에 그런 시시한 속임수를 쓰냐며 비난이 폭주할 것"이란 말을, 다른 맥락 속에 슬쩍 끼워 넣는 방법으로 부담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미스테리 작가라면 멋진 암호물 하나 정도는 세상에 척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르블랑은 심혈을 기울여 이 작품을 썼겠으나, 냉정히 말해 이 작품 역시 <기암성>, 혹은 전작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암호 트릭 자체는 볼 것이 없습니다. 익히 보던 "또 그 장치"가 그대로 나옵니다.

 

르블랑의 최대 장기는 역시, 휘몰아치듯 독자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박진감에 있습니다. 개연성의 부족을 탓할 수는 있으나 우연의 지나친 개입은 그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데, 뤼팽의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이죠. 어려서 제가 읽었을 때도 어렴풋이나마 이야기가 중간에서 한 번 툭 끊어지더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데(약간 무서운 삽화와 함께), 지금 읽어도 르노르망 국장의 안타까운 실종과 그 "뒤처리"는 다소 무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연작을 읽는 독자는 전적으로 뤼팽의 팬이 되어 그가 모는 쾌속의 사두마차에 합승하는 것이므로,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암성> 뿐 아니라 뤼팽 시리즈 중 장편은 거의 모두 (좋게 말해서) 엄청나게 큰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이 작품도, 상테 교도소에 다시 수감된 뤼팽은, 탈옥을 이룰 마땅한 방도가 없어, 거의 공매도 수준의 언플을 세계구급으로 펼치는데, 낚시에 걸려 든 사람은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후예"입니다. "카이사르의 후예"라는 표현에 민감할 건 없습니다. 이로부터 200여년 전, 루이 15세는 합스부르크 가와 역사적인 국혼을 맺으며(이를 "동맹의 반전", 혹은 외교 혁명이라 일컬었죠), "내가 시저의 딸을 며느리로 맞다니.,.."라고 그 감회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황제 칭호를 쓰는 군주에게 으레 베풀어주는 수식어입니다. 민감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어 가면서 뤼팽이 자꾸 좀처럼 내비치지 않던 긴장감을 내색하며, 기적, 기적을 되뇌는게 무슨 이유인가 궁금해할 만합니다. 뤼팽(르블랑)이 수다스럽기는 해도, 이런 강도 높은 표현을 여태 잘 쓰지 않았기 때문이죠.

 

과거 판본이나 성귀수 선생님 책엔 그 군주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OOO가 그대로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는 그 말을 쓰지 않고 그저 일반명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스포일러라서 이 정도밖에 못 적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독자라면 "그"가 느닷 OO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헉!"하고 몸에 전율이 일어야 합니다(저는 이 서평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소름이 돋네요). 그런데 이런 효과는, OOO라고 원어 그대로를 쓰면 몇 배로 증폭되던데, 그냥 저런 평범한 말을 써서 그게 좀 아쉬웠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대개는 제목을 그저 <813>이라고 하지 않고, "~의 수수께끼" 등등 해서 뒤에 뭘 붙여도 붙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원어대로 그냥 <813>이라고만 하고 마는데, 다른 D출판사 책도 이런 태도입니다.

 

여기서 모 재상의 제자였으며, 등극 후에는 안면을 바꾸고 그 재상을 숙청해 버린 어느 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태도와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말로 살짝 띄워주다가, 문제의 현장에 도착하자 "예의는 다 걷어버리고 아랫사람 막대하듯하는" 본색이 드러났다는 둥 좀 민망한 폄하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외국의 이 정도 고위 인사(?)를 등장시키는 것도 큰 결례인데(이렇게 막나가는 사람이니 고작 이웃 섬나라의 캐릭터를 두고 개 취급한 정도야 놀랄 것도 없죠), 그 묘사조차 무엄한 구석이 많으니,... 허나 이후의 작품에서 이분에 대고 "일국의 지존치고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같은 막말까지 한 것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이 당시 불-독 양국의 적대감정이 극단에 치달은 걸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긴 하지만(모로코 인시던트 같은 건 본문에 그대로 언급이 됩니다).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소설은 프랑스의 국무총리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당적이 급진당 운운하는 걸로 보아, 그 무렵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가 그 모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물론 밋밋한 캐릭터라 모델 운운하는 게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만. 뤼팽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개인적 한까지 저리 절절히 품을까 싶은 알사스-로렌 문제에 대해, 이 클레망소가 이로부터 4년 뒤에 발발하고 8년 뒤에 승전으로 마무리된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프랑스측 전권 대표로 참석하여 당당히 재병합을 이뤄낸 점을 생각하면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죠. "급진당"은 당명이 어떤 착각을 부르기 쉽지만, 그렇게 과격한 무리들이 이룬 정파는 아닙니다. 그냥 중도좌파보다 더 색깔이 선명한 팩션 정도로 생각하면 되고, 아직도 이 이름과 법통을 이은 정당이 현존합니다.

 

뤼팽은 여러 장면에서 우스운 대사와 모습을 많이 드러내죠. 2권 마지막에 보면 구멍이 뚫린 배 안에서, 멀리 포위해 오는 경찰들을 향해 "그 사격 솜씨로 어디 나를 맞추겠어?"라며 조롱하다가, 정작 자신은 별 겨냥도 하지 않고 멋지게 명중시켜 버리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경탄과 폭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 장편에서도 루돌프 케셀바흐의 권총에 미리 손을 써 놓고는, "선생의 총에는 아마 공기와 적막이 장전되어 있나 보죠?"라고 그를 놀리는 대사가 너무도 우스웠습니다. "나는 세계의 그 어떤 부자보다 부유하니, 그자의 재산이 이미 내 재산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과연 월드클라스 도둑놈 아니면 칠 수 없는 멋진 허풍이요 개드립입니다. 그 뒤에 이 앞 어구와 병치를 이루는 다른 말도 덧붙이는데, 이 부분에서는 헛소리지 싶었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일종의 복선 노릇을 하는 걸로도 해석이 되어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네요.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 제법 은근한 암시가 (르블랑의 타 작품에 비해) 군데군데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크게 칭찬할 건 못 되고, 그저 다른 작품에 비해선 독자에게 친절한 장난을 좀 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 작품은 범인이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한번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정체가 머리에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전에 읽은 후의 다시 만남이라 해도, 마치 간격 없는 재독 삼독의 경우처럼, 소설의 복기가 매우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이 있죠. 아마 처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제법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르노르망이 지하에 고립되어 익사 직전의 위기에 몰릴 무렵, "너무 고통스러워 원인이 뭘까 생각해 봤더니 배가 고팠던 것이었다"는 (과연 노인네 입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를 담은) 문장에선 실소가 폭소로 바뀌었는데, 결국 이것도 일종의 서술 트릭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다른 많은 독자들처럼) 이 <813>을 뤼팽 등장작 중 최고로 꼽습니다. 여기 나오는 주느비에브는 제가 독서 이력 중 처음으로 만난 그 이름의 캐릭터이고, 이 이름이 보통 연상하는 바 그대로 한없이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선량한 여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나나 무스쿠리가 부른 샹송 <pardonne moi>에도 이 여성형 이름 Genevieve가 나오는 걸로 착각했었는데, 가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Je viens 라 하고 있더군요.... 여튼, 처음에 뤼팽이 그 가난한 시인에게 왜 그리 잔혹하게 구나 싶었는데(사실 그런 게으르고 나약한 자는 당해도 싸죠), 알고보니 뤼팽은 OO감을 고르고 있었으니.... 물론 신분 사기극을 벌이기 위한 괴뢰를 찾고 있던 것이긴 하나(이 역시 독자로선 처음에 이해가 안 가죠. 구태여 가짜 상속인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텐데... 허나 뤼팽은 차원이 다른, 국가 규모의 사기를 이미 이때부터 칠 요량이었다는...),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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