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아픔
소피 칼 지음, 배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1985년 1월 25일 금요일.


이 날은, 당시 서른 두 살이 채 안 되었던 여인 소피가, douleur exquise, 칼로 찌르는 듯한 이별의 아픔을 겪은 날입니다. 가상의 날짜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대열에 끼인 시각들,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돌고 있던 흔적의, 뚜렷이 실존하는 물리적 일부분입니다. 생년생일이 저 날짜 근처이신 분들은 특히, 이 서늘하게 시려 오는 아픔을 담은 기록이, 픽션이 아닌 현실의 호흡으로, 그 요일과 날짜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까지가 실감될 것입니다.



소피 칼은, 수필가, 설치 미술가, 사진작가이며, 물론 현재도 활동 중인 예술가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실연의 모진 슬픔을 겪었던 "그날"을 중심으로 삼고, 그 전의 92일, 그리고 그 후의 99일을, 다이어리 형식으로 써 간 책입니다. 192일 중 빠진 날도 있고, 이별의 그 날은 이미지 하나로 처리되어 있으며, 이별 후의 99일은 좀 빠른 템포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기록"을 보았을 때, "이런 책도 다 있구나," "책이 아니라 다른 분의 다이어리를 훔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텍스트의 양적 비중이 매우 적고,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사진으로만 채워진 책 같습니다. 말투와 포맷이 지극히 사적(私的)이라,  공개적으로 출판된 책이 아니라 자유롭게 쓰여진 누군가의 일기장을, 별 죄의식 없이 구경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분명히 사진인데도 손으로 그린 화첩을 보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에 이런저런 기법이 많이 가해진 이유가 있겠고, 색감이 꽤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원색적이지는 않은 이유도 있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날짜에 자신이 느낀 감정의 색채, 상흔의 입체감을, 잘 어울리는, 잘 대변하는 사진 한 컷(혹은 여러 컷)을 내세워, 몇십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용한 그녀의 솜씨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미지가 독자를 압도하는 책이지만(확실히 이런 예를 보면, 사진은 아무나 찍는 게 아닙니다), 텍스트 역시 평범한 심상이 아닙니다. 일본의 어느 곳, 중국의 어느 곳(아직 1980년대 중반인데도요),인도의 어느 곳들을 들렀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았다 같은, 일상의 직서만 남겼다고 생각되는 페이지에서도, 그녀의 남다른 느낌, 깊은 감상이 짙게 배어납니다. 절제된 스타일의 모더니즘 산문시(詩)를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이별을 겪기 전- 정확하게는 "그"가 약속한 장소, 시각에 나타나지 않고, 호텔 프런트를 통해 전달된 전보로, 비루하고 간접적으로 "현장에의 반(半) 고의적 부재"를 알려 온 그날, 소피(가끔 "안나"로도 둘러서 일컬어지는)가 거의 인생의 분기점으로 지각할 만한 그날로부터, 자신도 모른 채 D-Day를 슬금슬금 맞이하고 있던 그 시간들의 태평스러움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태평스럽다고는 하나, 여인 특유의 예리한 직감으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방향에서 이 타격과 이 붕괴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음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선명하게 직관하지 못했다는 데에 대해, 그녀는 무려 이십여 년 가까이 회한을 가득 품어 오다, 2004년 마침내 책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그 작품을, 10년 가까이 지나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입니다. 이 쓰라린 아픔의 기억은, 책뿐 아니라 사진전, 그리고 행위예술로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책은 마치, 복수 여권에 visa 스탬프가 소인(消印)으로 찍혀 나가듯, 파국을 향해 속절없이 지워져 나가는 날들, 날들이, D-Day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정말로 텍스트와 사진 위에 -인쇄이지만- 빨간 스탬프가 찍혀 있고, 이 빨간 색은 책의 옆면 전체에 코팅된 붉은 색과 손 잡듯 이어지며 여러 느낌을 전달합니다). D-Day는 말 그대로의 뜻일 수도 있고, 여기서는 douleur의 d를 특별히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열차편으로 모스크바와 시베리아를 경유, 베이징을 지나 뉴델리까지 왔습니다. 지구 거죽 둘레 1/4에 가까운 거리를 육로로 거쳤습니다. 막상 도달해 보니, "그"는 무성의한 전보 한 장을 보내왔을 뿐입니다. 여인이라면 -그녀와 같은 섬세한 타입이 아니라도- 이 엽기적이고 악랄한(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바라맞힘"에 대해, 일생을 두고 치를 떨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쓰라린 체험, 감정상의 격동을 속으로 숨겨둬야 한다고 일단 여기는 건 지구 어디서나 여자에게 공통인 심리일까요. 소피 칼의 이런 절절한 표백과 공포는, 우선 선행하는, 선행하였던, 수치심, 망설임, 자기 보호 본능에서 유래한 바쁜 심리의 가닥들이 가슴 속에 무수히 스쳐갔음을 (역설적이게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안에 다른 시점 다른 맥락의 텍스트, 로그도 실려 있습니다. p76~79에는 에르베 기베르, 당시 르몽드紙 소속 기자로서 그녀 소피 칼을 인터뷰했던 이가, 유력지에다 그렇게 큰 비중으로 정성들여 소개한 기사를 실어 주고도, 본인 사진 원본을 제때 돌려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소동을 다 부린 일에 대해, 기베르의 시점으로 적은 기록 일부가 발췌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칙 편집을 통해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사정을 객관화하여 전달도 하고, 아마도 먼저 세상에 알려졌을 그 사건의 "기베르 버전"에 대해 해명과 (어쩌면) 사과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주를 통해 기베르의 자전 소설에서 pp. 122~125를 인용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나도 끔찍한 실연의 악몽은 여인의 영혼 한 구석을 점유한 채 쉬이 놔 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을 더욱 몸서리치게 하는 건, 그 실연이 전혀 예기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엄습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는, 지독한 감상과 자기 연민으로 텍스트와 화면이 채워져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은근한 유머와 의연한 태도, 혹은 여태 살면서 소피 자신이 남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도 회고하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감성과 회고가, 겉으로만 봐서는 건조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처럼 겉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게 특이합니다. 담담한 기록 속에, 여백, 그리고 (느닷 단절된) 맥락이, 이 여인의 아픔과 당혹을, 구구절절한 말의 연속보다 더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D-Day 당일의 페이지는, 호텔 객실의 전화를 찍은 사진(수채화 같습니다. 왜 제가 묵는 호텔 방은 이런 색감이 안 피어나죠?)와, "이런이런 전보가 왔다."는 진술뿐입니다. 자제된 언어 속에, 천 가닥 심회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행위예술로까지 승화되어 타인과 공유하는, 버려진, 버려졌던 어느 여인의 아픔은, 개인의 마음풀이를 넘어 불특정 다수에게 공공 백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닌 독자에게도, 여인들의 상처와 그 마음 가는 길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서평에 사진을 더 많이 담아야 하는데, 잘 나온 사진 찍으려고 책을 넓게 벌릴 엄두가 안 나는 애서가라서 요 정도만 업로드함을 양해해 주세요. 온-오프라인에서 래핑되어 유통되는 게 보통인데, 책을 처음 받아 들고 비닐을 뜯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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