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의 풋라이트
찰리 채플린.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전이라 쉽게 불리기엔 너무도 현대적인 그 고전 <라임라이트>를, 보지 않은 이들은 많아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 음악이, 관련 어느 정규 교양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쓰인 것도, 한국에서의 현재 유명도에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우면서도 뭔가 말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담은 애잔한 테마는, 그저 듣기에만 스산한 듯 달콤한 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내용, 주제, 분위기를 선율적으로 완전히 체화한 명곡인데요. 잘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이 주제곡은 감독, 각본,  기획 등 1인 8역을 소화한 걸로도 유명한,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솜씨입니다.

이 책은 그 성격과 개성이 다소 묘할 뿐 아니라, 그 "의의"에 대해서도 한 차원으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이 책은 1) 채플린 본인이 쓴 소설을 담고 있고, 그것의 제목이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풋라이트>입니다. 2) 그러나 이 책은 채플린이란 복합적이고 위대하며 다층적인 성격의 거인을, 특히 어느 한 시기와 한 대표작(그는 한 손가락으로 무엇무엇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모든 성취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그런 예술가였지만)에 초점을 두어 분석한 평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3) 마지막으로, 이 책은 그의 가장 헌신적인 스탭이자 지근거리의 관찰자였던, 어느 노장의 "팬북"이기도 합니다. 팬이 쓴 헌사, 찬미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회고에 대해서는 정확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모순과 논란으로 점철된 이 천재  예술가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 대해 온당한 조명("라이트")를 비추려면, 발("풋")로 뛰어 사랑과 존경, 열정을 가득 담은 추적과 해명을 펴 나갈 수 있는 이의 재능과 경력과 통찰이 필요합니다.모든 팬북이 그런 것처럼, 이 책도 내용의 충실함 못지 않게, 예쁜 장정과 외관,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 솔직히, 채플린에 대해 무지하거나 별 감흥을 안 가진 무심한 독자가 봐도, 이 책 한 권 때문에 관심이 생길 만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예술가나 영화예술 장르 전체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는 이도, 그저 책이 예뻐서 갖고 싶고, 책 가진 김에 채플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기회를 가질 것 같습니다.



문외한에게도 구미를 당기게 할 만큼 깔끔한 모습과 포맷으로 꾸려진 이 책은, 그러나 채플린에 대해 제법 많은 지식을 가진 이들도 아마 처음 접할 만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굴해 내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이 책은 동시대에 산 동년배(서로 생일도 얼마 차이 안 나는 진짜 동갑내기라고 하는군요)로서,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천재 예술가로 교류하였던, 러시아 출신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 그 시작을 삼습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소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어느 춤꾼과 그의 후원자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설정을 그 뼈대로 잡고 이야기를 꾸려 나갑니다. 훗날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완성된 모습으로 굳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남성의 후원과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보란 듯 그 오랜 애정과 은혜를 배신하고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여배우, 다만 이를 진정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며 '무대 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남성"에 대한 테마는, 이후에 나온 많은 작품들에 크고 다양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1950년대 헐리웃의 신성으로 떠오른 오드리 헵번도, 이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고, 얄궂게도 멜 퍼러와 그녀는 실제 인생에서 이와 매우 닮은 사연을 빚은 적도 있습니다. 도스토옙스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 뿐 아니라 실물의 모사품을 마법처럼 뽑아낸, 크고도 넉넉한 품의 외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니진스키와 쇼 기획자이자 스폰서(이 단어의 부정적 의미까지 다 담은 뜻에서 그는 불멸의 "스폰서"였습니다)인 디아글레프에 대해서는, 천재 예술가의 삶과 성취를 파멸로 몰아넣은, 상업혼에 찌든 악마와도 같은 착취자요, 심지어 파렴치한 변태 성욕자로 치부하는 게 오늘날 우리 후대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신화적인 발레리노와, 그 발레리노를 무지한 세상 앞에 본연의 찬란한 면모로 소개했던 영민한 비즈니스맨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객관적인 태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도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니진스키는 채플린과 나이까지 똑 같은 친한 벗이었으며, 천재적 감성과 비전을 타고난 예술가답게 서로 공유하는 요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상 신랄하고 괴퍅하며 대책 없이 자기 중심적인 데가 있던 채플린은, 이 니진스키에 대해서도 자기 위주로 왜곡한 기술(記述)과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결코 다정하기만 하고 착하기만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아는 이들은, 이 논점에 대해서도 뻔한 허풍과 과장으로 쉽게 치부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적에 없었을 것만 같은 이 희극인에 대해 따뜻하고 풍요로우며 넉넉한 포용심을 가졌으리라 오해하는 수가 있지만(이런 선입견을 빚는 데엔 바로 <라임라이트>가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는 정반대로, 누구라도 쉽게 마음을 트고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괴짜에 가까웠죠. <라임라이트> 같은 남성의 순애보를 보고서도 참 역설적이다 싶은 게, 여성을 홀리는 데에 탁월한 재주까지 갖춘 이 희대의 바람둥이(대체 여자를 몇 명이나 갈아치웠는지요!)가 풀어내는 내러티브치곤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알 것 다 아는 관측자에겐 아이러니하다는 느낌마저 주기 때문입니다("그가 과연 이런 이야기를 가꿔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책에는 눈길이 가는 자료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p27이 싣고 있는 이미지는, 놀랍게도 에릭 캠벨, 니진스키, 그리고 채플린이 한 컷에 다 담겨 있는데, 처음 보는 분들도 제법 될 것입니다. 이 사진은 채플린의 1917년작 단편 무성영화 <자립재정>을 제작 즈음에 촬영되었는데, 아래 자료에서 보듯 책의 사진은 그 일부의 크라핑입니다. 원본에는 보시는 것처럼 더 많은 인물들이 실려 있습니다. (자료출처: www.discoveringchaplin.com/2013/10/russian-dancer-vaslav-nijinsky-company.htmleasy street) 참고로, 한국 한정 번역 제목인 "자립재정"은 오역에 가까운데 여전히 널리 통용되고 있죠. easy street에 그런 뜻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의 설명에 에릭 캠벨의 위치를 "니진스키의 오른쪽"이라고 적혀 있는데, 원본이나 이 발췌본의 상황이나 "왼쪽"이 맞겠습니다(사진의 피사체인 니진스키 입장에선 "오른쪽"이었겠지만). 저자가 "키큰 사람"으로 표현하는 에릭 캠벨은 당대에 꽤 유명한 배우였으며, 실제 신장이 2m에 달했던, 당시 기준으로 거인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이 사진의 얼굴도 분장 탓도 있겠으나 제법 무서운 표정입니다). 니진스키는 제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무원의 순종적 짜증을 담은 이상한 얼굴(바로 뒤 페이지를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이 안 가는 고혹적 자태를 담은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이고, 채플린은 거의 아이콘화한 그 모습 그대로를 이 컷에서도 유지하고 있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채플린은 아주 단신으로 희화화한 자태가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그가 난쟁이나 아니었을까 오해하는 이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평범한 단신" 수준인 1m 65였습니다. 반면 워낙 비율이 좋다보니 꽤 장신이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니진스키는, 역시 우리 예상을 배반하고 채플린과 절친 아니랄까봐 키까지 같은 단신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이처럼, 채플린과 그의 주위 사람들, 나아가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해서까지 참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죽고 난 후 그 흔적을 정리하려 들고 보면,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많은 정보와 자취를 남기고 있을까요? 채플린은 본디 영국 태생인 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완벽한 자아 실현에 성공한 케이스고, 다시 그 "제2의 고향"으로부터 얼김에 축출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는 "세무 관련 동기" 때문에 스위스에 거주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가 잦다 보면 (후대의 저널리스트나 전기작가들에게 대단히 불리하게도) 그의 흔적이 잘 남아 있지 않는 수가 많으나, 그는 (이 책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기적적이라 할 만큼, 특히 특정 시기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아무리 채플린의 위대함을 잘 아는 이라 해도, 이런 날것 그대로의 난장판을 보고 나면 신물과 환멸을 느끼기 쉬운데, 제가 이 서평 첫머리에 적었듯, 열렬한 찬미자, 혹은 수제자급 인물이 아니면 이들을 유의미한 질서와 맥락으로 정돈, 재창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작업은 따라서, 소설에 대한 총체적 주해서이며, 다큐멘터리성 리포트를, 그윽한 감성과 통찰로 예쁘게 짜 낸, 채플린을 위한 소(小) 우주라 불러 줘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긴 소개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올컬러 책장만 휘휘 넘겨도, 독자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책이리고 하면 아주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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