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브라이드
윌리엄 골드먼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 읽으신 분들, 참 재밌었죠? 그런데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예전 영화는 더 재미있습니다. 보통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라고들 합니다. 이런 마구잡이식 일반 법칙은 듣기에만 멋있게 들릴 뿐 안 들어맞는 게 더 많으므로 일단 신뢰는 보내지 않습니다만, 저 말만큼은 맞을 때가 더 빈번합니다. 대체로는 소설을 먼저 보고 다음에 영화를 보는 게 안전합니다.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재미 정도는 (거의 언제나) 소설이 더 넉넉히 뽑아내고 있으니, 설사 두 매체 중 하나를 희생한다 해도, 고른 다른 하나(즉 활자매체)에서 우리가 건지는 게 더 많기 때문입니다. "본질적 장르우월성" 따위의 이유에서가 아닙니다(그런 게 어디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소설과,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날린(이제는 언제 그 부음이 들려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고령이지만), 헐리웃에서 첫손꼽히는 거물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그는 스티븐 킹의 여러 소설을 영화제작용으로 각색했고, 심지어 워터게이트 스캔들 폭로의 주역 두 기자의 논픽션도 손을 보아 훌륭한 극영화의 토대를 마련했을 만큼 빼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각색만 잘한 게 아니라 그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오리지널 각본을 단독 집필했고(이 소설 p434에도 프랭클린의 이중초점[바이포컬] 어쩌구 하면서 암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성취로 서른 여덟의 나이에 영예롭게 오스카 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가 창작한 소설이니, 그저 스토리라인만 충실히 따라가도 대단히 흥겨운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겠고,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소설이라 어찌 보면 스크린으로 옮겨진 모습까지를 다 봐야 작가의 의도가 완성된 꼴로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소설 처음을 펴 보면 한국어판 편집측에서 "서문을 뛰어 넘고 91페이지부터 봐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입장에서 봐도, 그럼 서문이 90쪽이나 차지한다는 말이구나 같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영미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번역된 말로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든 독자라면, 뭔가 재밌기는 한데 종잡을 수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서문만 보고 지레 실망, 책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였을 것입니다(전 처음에 "뭐하러 이런 친절까지?"하고 의아해했었죠). 긴 서문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대본소용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하고 정신 없는 사랑, 모험, 좌절, 아슬아슬 트위스팅이 잔뜩 이어집니다. "반전"이다 뭐다 하면 현대의 트렌드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구성상의 짖궂은 비틂은 아주 예전, 대중들을 겨냥한 싸구려 상업물에서 필수 요소로 장착하던 본체적 부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확실히 B급 티가 줄줄 납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B급은 B급입니다. 이 영화에서 잘생긴(두건으로 가렸을 때가 더 잘생겼습니다) 남주(즉! 웨슬리) 역을 맡은 캐리 엘위스는 15년 후 <쏘우>에서 화장실에 발목이 묶인 채 다른 한 남자와 죽음만 기다리던 시든 중년의 얼굴을 한 닥터 바로 그 사람이죠(세월의 힘이란 버터컵도 추레한 아줌마로 만드는 법이니...). 그러나 이 소설은, 물론 영화 못지 않게 재미있긴 하지만, 싸잡아 B급이라 쉬이 단정하기엔 많은 망설임이 앞섭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고급품이 아님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미리 선수를 치듯, 작가는 곳곳에서 현란하고 정신 없는 유머를 구사합니다. 책 p239에 보면 "한국의 주지쓰 챔피언, 인도의 가라테 챔피언.." 같은 게 "실제로는 실력 없는 자들과 (거인 페직이) 겨루었다는 걸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역자가 각주를 달고 있으나, 아무리 풍자적 희극이라곤 해도 스토리 안에서 페직이 천하무적의 괴력을 지녔고 격투 기술이 빼어난 건 사실입니다(여기서 작가가 그런 걸로 웃기려 들지는 않습니다). 이건 그냥 표현상의 위트일 뿐이죠. 페직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으나, 그가 제때 그 재능을 발휘 못하는 장면을 보고선 우리 독자들이 웃어 줘도 되겠네요.

 

이야기는 정말 만화처럼 재미있습니다. 이니고, 패직, 시칠리아의 꼽추 등이 나올 땐 피카레스크 구성처럼 샛길로 빠져 그들의 지난 내력도 느긋하게 들려 줍니다. 어려서 비열하고 잔인한 귀족에게 절세의 도검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를 살해당하고 열 살 나이의 자신은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얼굴에 입은 이니고. 아 진짜 이런 사연만으로도 그는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누가 천재 아니랄까봐(이들은 어이없이 너그럽다는 게 공통점이죠) 괜히 신사도를 발휘하여, 괴력과 집념을 지닌 듯 보이는 검은 두건을 살려 준 것만도 가상한데, 하필 이 긴박한 순간에 자신의 검술을 능가하는 지구 유일의 고수가 바로 그 사내였을 줄이야! 소설은 엉터리 검술 용어를 잔뜩 늘어놓고 있지만, 묘사가 워낙 생생하고 촘촘해서 눈 앞에 영화 한 편이 재생되는 듯 흥미롭습니다.

 

아무리 절절한 사연과 한을 가지며 성장했고, 또 신이 단 한 사람에게만 부여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외나무다리(아니, "광기의 절벽") 끝에서 만난 적수가 자신보다 더 강한 동기를 지녔고,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굳센 자였다니,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니고는 그저 복수와 설욕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이지만(물론 이런 그의 동기도 장난 아닌 진정성을 가졌죠. 이니고는 나중에 원수의 비겁한- 이자는 귀족인데도 모럴이라는 게 전무합니다- 흉계에 빠져 과다출혈로 다 죽어가면서도, 죽은 부친과 스코틀랜드의 그랜드마스터가 영적으로 독려하는 바에 따라 결국 ....할 정도로 독한 사내입니다), XXX는 사랑, 사랑에 의해 숨쉬고 생각하고 걸음을 떼는 영혼입니다. 불공대천의 원수를 죽이고 말겠다는 그 집념도, 여인을 향한 사랑보다 순도가 강할 수는 없다는 게 은근 진지한 작가의 암시이겠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결국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니고 역시 XXX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니고는 검술의 재능(다시 말하지만 신이 지상 단 한 사람만에게 부여한 재능입니다)만 지녔지만, XXX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배우겠다는 의지, 즉 "노력하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이니고가 결투 중 넘어진 건 기술과 체력도 딸렸지만, 그보다는 "세상에  나보다 칼을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었다니!" 같은 당혹감이 더 컸을 겁니다. 게다가 XXX는, 사랑이라는 동인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 아닙니까. 오, LOVE CONQUERS EVERYTHING!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배우고, 그래서 바뀌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려는 고집은, 정체성(正體性)의 보존이 아닌, 정체(停滯)와 퇴행을 낳을 뿐입니다. XXX는 세상을 주유하며 검술 뿐 아니라, 처세와 학식,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까지, 모든 요령과 기술을 최고의 학습자가 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칠해의 지배자가 된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정신 없이 코믹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끊임 없이, "넌 아마 내가 이럴 줄 알았겠지만, 난 너의 그런 생각을 읽고 이런 대비를 했었다!" 같은, 가위바위보의 초절정 고수 같은 유치한 매너를 끝까지 잃지 않고 재롱을 (독자 앞에서) 피웁니다. "두 병 중 어느 것에 독약이..." 같은 트릭은 아주 역사가 오래되었죠(BBC <셜록> 첫 에피소드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셜록은 바보인지 그 농간에 넘어가 진짜 고르고 알약을 삼키려 듭니다). "천재만이 바른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뻥입니다. 확률의 구조적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천재라면 풀 수 있다."를 계속 되뇐다? 이건 이 게임 전체가 사기라고 미리 (공정하게) 가르쳐 주는 거죠. 그런데도 시칠리아의 꼽추는 뭘 해보겠다고 답을 고른 후, 상대에게 속임수까지 부리다 죽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전혀 아니었나 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들만 봐도 해학적 느낌이 가득합니다. 처음부터 웃기려고 작정하고 쓴 소설이라서 그런데, 해적왕 로버츠만 해도 아이들 만화에서 해적의 단골 대사로 쓰이는 Arrrrrr.. 를 두문자로 가진 가장 흔한 "로버츠"고.. 여주 이름 버터컵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죠. "웨슬리"도,... 음, 혹시 Wesley가 아닐지 행여 착각하지 마십시오. Westley입니다, 저는 이 책 원서를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만, 영화를 보면 또렷이 t가 들리게 발음되는 "웨스틀리"라서, 이걸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t가 종종 blur된다고는 하나, 이 경우는 예외지요. 진짜 서문 건너 뛰고 소설만을 다 읽은 분들은, 이제 서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사실 서문은 서문이 아니라, 소설의 액자 연장입니다. 모겐스턴은 실존하는 작가가 아니고, 이 소설 역시 단축화 이전 원본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모겐스턴 부인의 원형은 골드먼 자신의 (이혼한) 부인인 헬렌일 뿐입니다. 이 한국어판은 원작 소설의 (무려) "30주년판"입니다. 이것 관련 번잡한 설정은 모조리 작가 골드먼의 페이크입니다. 어떤 작품이 자신의 30주년기념판을 가질 수 있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왜 이 작가가 이런 특이한 얼개를 짜고 있는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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