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뉴엘 1 - 육체에 눈뜨다 에디션 D(desire) 7
엠마뉴엘 아산 지음, 문영훈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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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뉴엘은 고상한 취향과 평판 좋은 신분을 지닌 장을 남편으로 둔 유부녀입니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점이 많지만, 여튼 그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로나 스스로 판단하기로나 어엿한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필름에 주연으로 등장한 실비아 크리스텔을 두고, 6개 국어에 능통했다거나 IQ가 160이 넘었다거나 하는 소문을 들려주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일단 얼굴에서 그리 지적이라거나 야무진 인상이 풍기지 않고, 작품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이 들어왔을 텐데 돈 관리를 제대로 뭇해 말년에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든가, 우리 나라 제작진에서 발주한 어느 에로 영화에 등장할 때(일단 그 시절의 한국 영화에, 월드스타가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부터가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니죠) 같이 출연한 배우가 "매우 지치고 늙은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를 통해서도, 그리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여성은, 일단 사소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찾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 똑똑한 분이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크리스텔의 이미지로 영원히 우리 뇌리에 남을 캐릭터 엠마뉴엘은, 그러나 이 원작 소설에서 생각 외로 적극적이고, 학문적 배경을 없잖이 갖춘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여성이 수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이 소설이 무대가 된 시대만 해도 일단 눈을 크게 뜨고 당사자를 다시 볼 만한 스펙이었음에 분명합니다. 한국이야 워낙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고르고, 학점 관리나 간신히 하여 졸업하는 풍토이므로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만(제 주위에 어떤 분도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셨지만, 제가 여쭤 보면 하나도 모르시죠 ㅎㅎ).

 

이 원작 소설에서의 엠마뉴엘은 그저 졸업장 간판으로만 "수학 전공"을 내세우는 처지가 아니라, 실제로 대화나 사고 구조가 합리적이고 냉철한 일면을 지닌 여성이더군요. 영화에서는 이런 면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요.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는 마리안느와 대화할 때, 둘 사이의 정신 세계가 얼마나 다른 컬러를 노출하는지 살펴 보십시오. 엠마뉴엘이 그래서 다른 이들과 시(詩), 문예, 그리고 설익은 채로나마 철학을 논할 때(여기서 그저 음담 수준으로 빠지지 않고 에로티시즘의 형이상학 쪽으로 간간히 -자주는 아니구요 - 방향을 트는 게 다 이런 지적인 배경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엠마뉴엘은 이제 인생에 있어 나른하고 설레는 봄을 맞이한,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이나 파피꽃처럼 싱싱한 청춘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마주치는 그 어떤 남성의 시선과 심작박동을 잠시라도 멎게 하는 아름다움을 지녔죠. 따분한 담론이 그녀의 터질 듯한, 그리고 방향 모를 아찔한 충동과 설렘을 붙잡아둘 수 없고,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곡선이 에워싼 그 몸이 자연스레 이끄는 바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장의 정부(그러나 장에게 부인이 있었다거나 한 사정이 아니라, 그저 혼외 관계라는 의미입니다)가 되었을 때, 나도 아이 아닌 여인이 되었다며 마냥 뿌듯해하던 그녀였습니다. 우리식 감정으로는 약간 이해가 안 되지만,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꾼 후 "이제부터 미시즈 OOO라 불러주세요."라고 긍지 가득한 톤으로 조음하는 여성들을 서양 문예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음... 그러나 엠마뉴엘은 여기서 잠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쪽으로 일탈하는 듯 보입니다(독자도 독자 나름이라 오히려 좋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수영장에서 이뤄진 캐주얼한 분위기의 부인들 회합에서, 그녀는 선배들 격인 이들 유한 마담들과 잘 지내야만 했으나, 왠지 거리감, 위화감만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미국 출신의 보이시한 숙녀 "비(Bee)"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는데, 이 때문에 위태하나마 성숙한 여인의 길로 성큼 들어서려던 그녀는 같은 성(性)에 유혹되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갈등 아닌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비"는 곧바로 다가서긴 좀 어려운 분위기라, 때마침 나타나 준 소녀 마리안느를 대체물 삼아 소통의 갈증을 풉니다.

 

영화에서는 이 마리안느(너무 철이 없죠)가 엥마뉴엘을 연모하며(연모라기보다 그냥 육체적 이끌림입니다) 여러 번 구애를 시도하지만, 자기 스타일 아니다 싶은 데다 그저 어리기만 한 소녀 쪽에 큰 설렘이 안 생기는 엠마뉴엘로서는 매번 회피하는 걸로 묘사됩니다. 반면 이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보다 복잡하고 알쏭달쏭한 모습인데요. 엠마뉴엘이 "여자 사이의 교감"에 대해 다소 옹호론 비슷한 조로 분위기를 잡자, 마리안느는 바로 이를 두고 허리를 자르듯 "철없는 애들이나 여자 맛을 찾는 것"이라며 상대의 코를 들어가게 합니다. 하긴 이래야, 많은 경험과 철이른 데뷔 덕에 세상이 뭔지 지긋한 관록(?)을 지녔으면서도, 그냥 짐승 수준으로 몸을 막 굴리지 않는 완성도 있는 캐릭터로서의 "마리안느"가 독자의 머리 안에 자리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화에서의 마리안느는 솔직히 그냥 포르노 엑스트라 같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영화에서의 엠마뉴엘은 내내 수동적이고 언제 위험에 빠질 지 모르는 미숙한 아가씨(물론 유부녀지만)로 비치지만, 소설에서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비와 마침내 뜨거운 밤을 지낼 때에도, 자신보다 연상이고 사람 사이에서 더 부대껴 본 상대를 두고 제법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입니다. 소통할 때 대화의 주도권을 연하자가 쥐는 건 그리 흔한 패턴이 아닌데, 소설에선 오히려 엠마뉴엘이 말을 더 많이 하는 듯하고, 심지어 행위에서도 상대 육체의 쾌감 포인트, 그리고 절정에 이르는 테크닉 몇을  가르쳐 주기까지 합니다("이거 너한테 배운 거야."라며 비가 엠마뉴엘을 크레딧해 주는 장면도 2권 후반에 나오죠). 영화에서도 이 소설에 묘사된 기법을 비에게 엠마뉴엘이 시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만, 내내 소극적인 태도만 보이던 엠마뉴엘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생각만 들었더랬는데요(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아마 생략된 장면에서 비가 가르처 줬겠지 짐작만 하고 넘어갔었습니다).  이 소설을 보니 그 장면도 납득이 됩니다. 감독은 자기가 읽은 텍스트, 그리고 머리 속에 구상한 씬을 독자가 당연히 알겠거니 하고 화면을 구성해서는 안 되는데요. 함축과 생략도 원칙과 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자캉의 솜씨와 역량에 대해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리안느("마리안느"와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중년 여성이고, 별로 호감이 안 생기는 타락한 여성입니다)가 백작 부인인 줄은 소설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엠마뉴엘에 반한 이 여자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 마침내 실내 스쿼시장에서 한 게임한 후 챈스를 잡아 회포를 (일방적으로) 푸는 걸로 나오는데요. 영화를 보시면 엠마뉴엘의 상체에 잔뜩 밴 땀을 닦아 주다가 "아, 도저히 못 참겠다."라고나 말하듯(그런 대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너져내리며 얼굴에 늙은 팔자주름을 잡고 자신의 육욕에 픽 굴복하는, 따라서 게임에서의 패자의 모습으로 이 늙은 아리안느가 묘사됩니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지 않고, 주도권을 누가 쥐는지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첫 정사가 이뤄지고, 주고받는 대화도 우열이 쉽게 가름 안 되는 팽팽한 분위기입니다.

 

남자가 제외되는 가운데 여성들끼리의 폐쇄적인 애정 행각으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엠마뉴엘이나 그 주변의 여인들이나 모두 미성숙한 루저로 남았을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를 풍기면서, 엠마뉴엘의 정신적 성숙은 그 육체의 게임과 모험에 동반하여 설레는  속도로 나아갑니다. 이제 이 즈음에서, "성(性)에 대한 그 모든 의문과 불안의 해소는 내게 맡겨 다오!"를 모토삼아 외치고 다니는, 에로티시즘의 차르, 타이쿤이신 마리오 아저씨가 등장합니다. 성 담론과 실습에 관한 한 슈퍼 마리오의 존호(尊號)가 아깝지 않은  이 구루(guru)의 활약은 제2권에서 본격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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