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람 인수대비 - 상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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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 바는, 수양대군 세조로부터 시작된 비정통 차자(次子)의 왕계가 이뤄 낸 역사에, 이처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도 꿰어져 등장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걸출"하다는 말은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한명회 같은 이도 나쁘게 보면 간신이자 정상배였지만, 아직 그 건국의 기반이 내내 튼튼하지만 않았던 조선 초기에, 각종 행정 수완을 발휘해서, 시스템상으로 흔들리지 않는 펀더멘털을 형성한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왜구의 발호를 국제정세적 주요 변수로 간주하지 않을 무렵 "거리가 가깝고 인구 수가 많으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화친하며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에서 선구자적 안목으로 적어 둔 바 있는 경세가였습니다.

세조의 아들이자 소혜왕후의 부군이었던 의경세자가 낳은 아들이 성종이었는데, 묘호가 성종인데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가 시작한 국체(國體)의 공사를 튼튼히 마무리한 이가 바로 9대 임금인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감상적으로 봐 주자면 비운의 군주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이었습니다.

고려 때에야 신하에 의한 폐립이 잦았지만, 확고한 유교 통치 이념이 정착한 후로는 극히 드물게 보는 일이 소위 "반정"이었는데요. 단 두 명의 폐출 군주 중 하나가 이 연산군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큰 정변을 겪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위화도 회군에 이어진 우왕 폐위는 얼마 가지 않아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죠), 오히려 중앙 집권을 더 강화하며 확고한 농민 장악과 수취 체제의 완결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바로, 조선 시대의 척추에 해당하는 세조 말년~ 연산군 시기의 모습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하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소설의 포맷이라면 작가의 과도한 상상력이 끼어들어 정사(正史)의 이해에는 방해를 끼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대중서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왕실 세계도와 각종 자료를 풍부히 집어 넣어, 본문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이 왕족이 누구의 몇째 아들이던가?) 수시로 참조할 수 있게, 독자의 편의를 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사료가 많이 삽입되면 딱딱한 학술서가 아닐까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설처럼 술술 읽힙니다. 정사의 정연한 체제와 팩트 사항은 그것대로 담고, 다만 문제가 격의 없이 물 흐르듯 읽히는 게 소설의 맛은 그것대로 살렸습니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우수한 매력입니다.

최근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대어를 자주 삽입하여, 지난 시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독자의 머리 속에 피어오르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저 생경함이 적어서 좋을지 몰라도, 월탄 박종화 같은 정통파 역사소설 작가의 고풍스러운 필치에 맛을 들인 독자에게는 그런 시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스러운 어휘가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어, 시대물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줍니다. 또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가 시대순으로 기계적인 서술을 따르지 않고, 저자분께서 상상의 방향이 옮겨가는 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취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 책은 컬러 사진이 유독 많습니다. 종이 질도 최상급입니다. 이런 책 중에 이처럼 편집과 외관에 큰 공을 들인 경우는 좀처럼 보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제값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표지에 나온 것처럼 수능에 과연 도움이 될까요? 최근 출제 경향은 단편적 사항 암기를 테스트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적을 원형 그대로 제시하여 시대 속성의 정확한 이해에 성공했는지를 묻는 문항이 많다고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진과, 풍성한 배경 설명은 역사의 입체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타가 (이렇게 미려하게 편집된 책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 등장하고, 예컨대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며 문종비가 세조의 꿈에 등장한 후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야사에 가깝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잖게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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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2-2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