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 알마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명의는 허경진 교수의 "편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열전" 은 일차 사료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사관의 직접 취재가 개입해야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기록자의 시대가 피(被)기술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헌 고증이라는 간접적 방법론조차 통용의 한계가 있습니다. 허 교수님은 주로 <연려실기술>등 사인의 기록을 통해 이 책을 편집하였으므로, 제목에 쓰인 "열전"은 가장 넉넉한 의미로 새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열전>도 언제나 개인 중심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영행열전>, <자객열전>, <골계열전> 등 테마 위주의 편집을 택한 게 제법 되며, (그들 입장에서) 이민족의 내력과 최근의 동향을 다룬 <흉노열전>, <조선열전>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저자 허 교수님도 말씀하시듯, 어떤 가치 판단과 사상의 체계에 맞춰, 개인사는 하나의 도구적 방편으로 차용했을 뿐인 게 동양의 역사 기술 그 기본적 태도입니다.


따 라서 이 책이, "평민 열전"이라는 제목을 취한 건, <연려실기술>등의 문헌(혹은 그 저자)이, 자신이 속한 시대 정신 그 변화를 예리하게도 포착하여, 태생의 신분이 아닌 그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이, (유감스럽게도) 여러 문헌에 산재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처럼 책 한 권에 묶어 그 이상형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세기에 이 이름을 달고 대로를 뢀보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어야 마땅했던 그 내러티브들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이제서야 뜻이 통하고 배가 맞는 동무들끼리 한데 엮인 것으로 봐야겠죠. (저자는 자신의 전작 제목을, <조선위항문학사>로 하여 내었을 때의 아쉬움을 이제서야 해소했다는 취지의 소회를 밝히기도 합니다)


대상이 양반 신분인 경우에도, 사실 친우나 후손에 의해 문집 편찬이나 기록이 이뤄진 경우 그 객관성에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면천(免賤)에 갓 이르렀을 뿐인 한미한 출신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명이 이뤄졌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시문에 능하고 즉흥의 서술에 달통하거나 동서고금의 사항에 대한 박학한 이의 재주를 워낙 쳐 주는 시대였다 보니, 비록 신분이 버젓하지 못할 뿐 자유자재로 문자를 구사하는 은사(隱士)에 대한 찬탄이, 보는 이 누구에서건 정직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출신 성분에서나 스스로 성취한 문재의 수준에서나 타에 꿀릴 것 없는 이들로부터라야 정직한 칭찬이 나왔을 것이고(예를 들면 이 책의 전거를 이루는 이긍익 같은 이들), 그렇지 못한 채 타인의 성취를 시기 질투하기에 바쁜 속물들은 그저 남을 까내리기 바빳으리라 예상됩니다.


열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거나, 무고한 옥사를 치르거나, 괜한 모함을 당한 이가 유독 많습니다. 재주는 빼어난 데 비해 신분이 받쳐 주질 못하니, 그들이 헤치고 나가야 할 풍파의 험난함이 그만큼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여건 속에서 제 재주를 갈고 닦은 사연이 있어서인지, 후학을 돕고 곤궁한 동기, 친족을 보살피는 대인의 도량 역시 더 빛나더라는 게 공통되는 점이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앞선(심지어 종계 변무가 아닌 임란 청병의 공을 그에게 돌리는 version이 다 있을 정도니) 역관 홍순언의 사연을 다룬 것도 있고, 경종 때 노론 4대신 중 김창집, 그의 동생 김창흡 등이 보조 역할로 나오는 일화, 그리고 19세기까지 내려와 이건방 등이 등장하는 사연도 실려 있습니다.


각기 시대의 편차는 크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 재사들의 분투기는 언제나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바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주연급으로 등장했던 명문 거족의 명사들이, 이 책에서는 "평민 주연"을 빛내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런 위대한 평민들에게, 근대화나 개방의 물결에서 더 큰 역할이 주 어졌다면 국권의 침탈이 그리 쉬이 이뤄지지는 않았을 텐데, 저 현해탄건너 열도에서, 정치적 소외 세력이었던 사쓰마 -조슈 번의 지사들이 막부의 동요를 틈타 거침 없이 발흥했던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바 있어 읽는 이의 깊은 탄식을 자아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