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므랑 이영민
배상국 지음 / 도모북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530여쪽의 분량입니다. 옆에서 딱 놓고 봐도, 학부 과정 교과서 정도나 되는 듯 두껍습니다. 활자 크기가 작은데도 이 정도 두께이니, 어느 기준에서도 장편 소설이겠습니다. 실존 인물이기도 하고(그 정도가 아니라, 당대, 즉 일제 강점기를 사신 분들께는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나." 하실 만큼 유명인사였겠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故 이영민 선생이 워낙에 거한이기도 했기에, 그분을 다룬 소설이니 책이 이 정도 볼륨은 되어 줘야 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이런 소설이 흔히 그런 모습을 보이듯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만을 집중 조명하고 느닷 끝나는 구성이 아니었습니다. 탄생과 성장기가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되었을 뿐, 중노년에 접어들어 야구 협회 부회장을 맡아 일하던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시점까지, 위인이자 호걸,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이영민의 전(全)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야구를 보아 왔고, 열혈 야구팬이 보통 그러하듯 각종 통계(흔히 "스탯"이라 말하는)를 다 챙겨 가면서 보아 온 편이었습니다. 지금도 누가 물어 보면, 프로야구 출범 이래 몇몇 슈퍼스타들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특정 연도의 스탯을 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몰라도, 프로에서 주전으로 뛴 웬만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대략 몇 년도가 커리어 하이였고, 통산 성적 기준으로 역대 몇 위 정도라는 건 맞힐 수준이 됩니다.

 

야구가 팀 스포츠이긴 하지만, 개개인을 대상으로 다차원 통계 분석을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팀 스포츠이기에, 스탯에 밝은 건 바로 야구에 대한 정열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탯 뿐 아니라, 누가 몇 년도에 시즌 MVP였으며, 골든 글러브 수상자였다는 등의 "경력"에 대해서도 (박식 경쟁이 붙다 보면) 아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는, "젊은 타격 유망주에게 주는 영예로운,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어떤 상에 그 함자를 딴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뿐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절대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누리던 민족 스포츠 영웅이라는 점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 같이 정보가 흔한 세상에선, 간단한 검색 몇 번으로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찾아 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은 건, 아마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의 장에서, 설사 그 중에서 특출했다 한들 별반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법한 인물"에 대한 흥미가, 크게 동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 싶습니다.

 

장태영 선생, 남우식 선생 같은, 지난 시대의 레전드들은, 지역 명문고에 (공부 실력으로)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데다, 당대의 그라운드를 평정한 발군의 야구 기량까지 만인 앞에 증명해 보인, 요즘 시대에도 보기 힘든 불세출의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우리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분들에 대해서는, 스포츠 스타로서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고, 스포츠 저변 확대가 불비했던 시절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뜬 것 아니냐는, 아주 못된 생각마저 살짝 들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도, 막연하나마 저분들 연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영민 선생이 어느 정도 까마득하니 예전 분인가 하면, 제가 앞에서 열거한 저 두 분 대원로의, 아버지 뻘입니다. 남 선생 같은 분은 근년까지 대구 경북 지역에서, 대기업의 중역으로 한창 활동하시다 은퇴하신 상태죠. 이런 분들에게 연배상으로 거의 부친 세대일 뿐 아니라, 이분들이 야구에의 꿈을 키우고 성장하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까지 했으니, 야구팬으로 이영민 선생에 대해 몰랐다는 게 부끄러울 뿐 아니라, 왠지 죄책감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엄복동의 자전거, 안창남의 비행기" 이는 일제 시대 어린이, 혹은 일반 민중의 노랫가락으로도 익숙할 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런 스포츠 영웅의 대열에, 이 이영민 선생은 결코 빠질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입니다. 사실 다른 분들과 달리, 선생의 함자가 다소 "모던"한 이유 때문에, 그 정도로 옛날 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습니다(한자로는 榮敏이라고 쓰십니다. 이름과 그 실물의 생애가 서로 참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던"한 함자를 지닌 이 선생은, 그 이름으로부터 출신 성분의 짐작이 가능하다 할 만큼, 대구 경북 일대 큰 갑부, 대지주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려서는 공부도 잘했던 덕에, 부친은 아들이 공부로 대성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영민의 재능은 공부보다는 운동 쪽이었고, 야구를 비롯, 축구, 육상, 복싱 등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이 집안이, 그 본심은 어떻든 간에 자제들이 어른의 말에 잘 순종하지 않는 불운한 내력이라도 있는 탓인지(농담이 아니라, 이는 중대한 복선이 됩니다. 스포일러라서 더 이상은 말 못 하지만요), 영민은 중학생 시절 부친과 큰 불화를 겪고 지원을 중단 받습니다.

 

소설에서는 이 시절에 대해, 김윤희라는 이름의, 소작농의 딸과 소년 영민이 정분이 난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영민의 부친은 노발대발했고, 윤희의 아비를 불러 물고를 내고 소작 부쳐 주던 땅을 다 빼앗았다고 합니다(이 부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설정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는 "영민은 뒤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고, 수습에 나섰"다고 하지만, 성년에도 못 이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죠. 근데 사실이라면, 영민의 부친은 대단한 비위를 저지른 게 사실입니다. 또, 윤희가 비록 영민 오빠의 사정을 잘 이해할 만큼 철이 든 소녀였다고는 하나, 자신의 아버지와 집안이 풍비박산나다시피한 이 사건을 겪고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컸겠습니까?

 

소설은 제법 절묘하게, 이것을 훗날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김윤희가 본격 민족 해방 투쟁에 나서고, 동시에 좌경 사상을 갖게 되어 해방 후 월북까지 한다는 식으로 인물의 행적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영민의 마음 속에 아주 뿌리깊은 죄의식까지 심어 주어, 그에게 완벽한 배필(외모, 지성, 같은 스포츠 선수라는 배경, 어마어마한 재력가 집안 등 모든 조건이 부합)이었던 이보패와, 끝까지 화합을 이루지 못한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에 책장을 넘길 때는 소설의 뽄새가 (솔직히) 좀 허술해 보였는데, 읽어갈수록 빠져 드는 게 이런 의외의 치밀한 구성 덕이었습니다(물론 이마저도, 왠지 어렸을 적 읽던 스포츠 만화책에서 흔히 접하던 패턴이라고 누가 말하면, 별로 대꾸해 줄 말이 없긴 합니다만).

 

제가 좀 이해가 안 된 건.... 김윤희가 바로 일경에 적발되어 구타 등 모진 고문까지 당하고 난 후라면, 3년 형을 살고 나온 후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냐는 의문이었습니다(전과자, 더군다나 "후데이센진"이 교원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는 백기주와 이영민, 김윤희 3자 간의 관계도 다루고 있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 온 백기주와 영민의 조우가 이런 에피소드를 빚어야 이야기가 풀렸겠다 하는 정도로 넘어갔지만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아무래도 비열한 성격에다가 사사건건 영민의 진로를 훼방 놓던 마쓰모토를, 인격적으로도 한 수 위였던(과연?) 이영민이 "인간 말종 하나 사람 만들어 놓는 장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구체적인 건 스포일러이므로 말 못 하구요. 알고 보니 이 마쓰모토란 녀석, 그런 사연이 있었더군요! 어려서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우리의 영민 사마와 비교가 될 수 없죠! 마쓰모토 역시, 머리 돌아가는 수준에서나 현실의 권력에서나 단지 먹은 나이에서나 비교가 되지 않는 스즈키 상의 졸(卒)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가공할 악마 스즈키조차(그는 요미우리 신문 사주의 하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호프 이영민 선생의 그 순일한 투혼(일본 애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단어 "투혼"!)이라든가 인격적 깊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저는 그 일본인 경찰 서장이라는 자가, 이보패 여사한테 "조건"을 다는 장면에서, 혹시 무슨 추악한 요구라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아마 작가도 그걸 노리고 잠시 장면을 분할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 <300>에서도 그런 비슷한 설정이 있었으니, 귀부인이라 해도 식민지 피지배민족에게야 무슨 짓인들 못할까 싶어서였죠.

 

이 소설은 스포츠 이야기만 다룬 게 아닙니다. 작가는 별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표현 몇 구절 만으로, 읽는 독자에게 "이런 개만도 못한 쪽xx들!" 같은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더군요. 소설 읽으면서 스스로 민족 감정 고취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읽으면서 이렇게 자주 열이 받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소설의 부제를 보면 "조선의 베이브 루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영민이 실제로 자기 시대에 얻었던 별명일 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놓고 봤을 때 참 어울리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베이브 루스는 당대의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괴물급 히어로"였을 뿐 아니라, 너무도 결함이 많은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이영민 역시 소설의 몇몇 장면에서 뭇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장면 속에서 독자를 사정 없이 실망시키는 나약하고 허점 많은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이 소설 말미에 귀한 자료로 나와 있지만, 그는 실제로 1920년대에 전미 올스타 팀 일원으로 일본 투어 경기를 할 시절 이 베이브 루스와 조우했고, 사진에도 나오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이영민 한 사람만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그의 "연인"으로 당대 경성과 평양을 들었다 놨다 했던 숱한 기생들, 여배우들, 그의 "친구"로 당대 스포츠 스타였던 함용화(정확히는 형뻘), 백기주(유격수에 주로 3번을 치는 교타자, 준족이었다고 하니 홈런 타자보다 팀에서는 더 요긴한 선수겠죠. 예나 지금이나요),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 기자이자 시인, 소설가였던 심훈(심대섭), 이영민에게 선배였던 복싱의 레전드 성의경 등 당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저명인사들이, 이영민을 중심축으로 하여 등장합니다.

 

스포츠 소설, 영화에 언제나 감초처럼 등장하는, 날카롭고 삐딱한 기자 한 사람도등장합니다. 실존 인물 이길용이 바로 그입니다.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긴 하나, 마치 영화 <내츄럴>에서 로버트 듀발이 맡았던 맥스 머시 역처럼,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인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큰 걸 노리다 보니 헤드업이 되면서 어깨가 열리고.. "고 같은 말은, 현대 야구에서나 하는 말 아닐까요? 그나마 강타자가 좀 부진하다 싶으면 너무 흔하게 갖다 붙이는 "진단 아닌 돌팔이 진단"이기도 하고요. "종속이 좋다. 볼끝이 묵직하다"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은 이용훈 옹이라는, 작가의 외조부되는 분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용훈 선생은, 그 모친이 일본에서 허드렛일로 모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이었던 그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준 청년 이영민에 대한 기억으로 맺어진 걸로 나옵니다(이 설정은, 반은 픽션이라고 작가 스스로가 밝힙니다). 이용훈 옹은 아흔의 연세에, LG- 두산의 2014년 한국 시리즈 시구를 맡는 걸로 나옵니다. 한 2,3 년 뒤로 잡아도 될 것을, 곧 다가올 미래로 이렇게나 앞당겼으니, 작가분이 얼마나 열렬한 두산 팬인지 짐작도 됩니다. 두산은 사실 세기가 바뀌고 나서 누구도 부인 못할 강팀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데, 굳이 "좀 강해진" LG를 불러 잠실에서 자웅을 겨루는 걸로 무대를 꾸밈은, 이 작가분이 청년기를 보낸 1990년대에 "강팀 엘지- 약팀 OB" 구도에서 얼마나 맺힌 한이 컸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이용훈 선생을 인터뷰하는 기자는, 야구팬이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모를 수가 없는) 그 유명한 박동희 씨로 설정됩니다. 아마 작가분과 박 기자도 비슷한 연배겠죠? 일제 시대에 이길용이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다소 평이 갈리긴 하나) 바로 박식하고 날카로운, 현장 중심의 취재에 강한 민완 기자로서 바로 박동희가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처럼, 실존 인물을 자기 작품에 갖다 쓰는 데에거침이 없고, 그만큼 재미도 있습니다.

 

호므랑 이영민, 물론 동대문구장(지금은 철거되었고, 구 "서울운동장야구장"이었습니다)에서 조선인 1호 홈런을 날린 그였기에 이런 제목이 가능했겠지만, 그는 걸출한 능력, 파란 많은 인생, 주변을 휘어잡는 강한 개성과 카리스마로, 인간 자체가 "홈런"인 존재였습니다. 이 소설에 잘 나오지만, 그는 비단 야구 한 종목에만 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 아니 일류 스포츠 선수 몇 명 역할을 혼자 도맡아 할 만큼 "원 맨 특수부대" 같은 영웅이었지만, 그의 인생에는 기쁨과 행운 못지 않게 짙은 그늘도 적지 않았죠. 투수의 공을 받아 쳐 담장을 넘기고 천천히 그라운드를 도는 홈런 타자가 결국 돌아오는 곳은 담장 너머가 아닌 홈 플레이트이듯, 우리네 인생도 결국 잘난 이 못난 이 할 것 없이 귀착하는 지점은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덧없음도 깨닫게 해 주는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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