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 영광스러운 복음, 효과적인 전달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손창남 선교사님의 세번째 책을 읽습니다.

 

제가 저자님의 전작들을 읽고 느낀 바는,

1) 참 진솔한 이야기를 쓰십니다. 선교사님 정도의 위치에 계신 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막상 털어 놓으려면 참 민망하겠다 싶은 사연들도, 전혀 거리낌 없이 독자들과 공유하시겠다는 듯 다 이야기해 주십니다. 전작에서는 "그저 선교사님 개인의 스타일이려니" 하고 가볍게 받아들였는데, 이번 책을 읽어 보니 이것은 그 차원을 넘어 "선교의 철학, 신앙상의 원칙"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2)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보편의 원칙,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명제로 이끌고 가십니다. 이는, 듣거나 읽는 이의 신앙 문제를 초월해서의 일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저 자신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모든 이가 동의해야만 하는 양 강경하고 편협한 어조로 몰고 가는 저자를 흔히 봅니다. 책은 물론 저자 자신의 의견을 내어 놓는 장이지만, 그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은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야만 합니다. 손창남 선교사님은, 정확하고 반듯한 문장(언제나 느끼는 바입니다)을 구사하시면서, 내용 역시 신앙인, 비신앙인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주제로 거부감 없이 이끌고 가시는 게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 참 겸손하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강연을 들은 적도 없고(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출강도 하셨으니 예전에 제가 살던 곳과 가까운 편이었는데도요) 사진으로나마 접한 적도 없지만, 글만 읽어도 얼마나 겸손한 분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직분에 어울리시게 엄청난 수양이 쌓인 분이실 것 같지만, 어떤 겸손한 행동을 하실 때, "누가 나를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볼 것 같아 자제했다."라고만 말씀하실 만큼 솔직하고 겸손하십니다. 수양과 내공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남 보는 시선 때문에 참았다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읽는 독자로서 부끄러워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에게 어떤 행동 중 100 중 99가 나쁜 동기이고 단 1만 착한 뜻이었다고 해도 그 1 쪽으로 합리화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손창남 선교사님은 100 중 99가 올바른 동기이신 것 같은데도 굳이 부끄러운 1로 돌리고 마십니다.  진정한 인격자는 이런 점에서도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문화와 선교>입니다. 말 그대로, 외국에서, 그것도 기독교라는 정신 체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에서, 어떤 데에 유의하고 조심해야 할지, 그리고 그런 실용적 팁을 떠나서, 선교사로서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저는, 선교나 신앙 문제를 떠나서, 나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의식을 가진 분들을 상대할 때, 어떤 점을 조심하고 어떤 점에 신경 써야 하는지, 그 원칙을 가르쳐 주는 책으로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문화 상대주의"라는 개념을 배웁니다. 내가 옳다고 믿은 것이, 예의에 바르다고 믿은 것이, 다른 문화권에 가면 전혀 반대의 의미로 통할 수있다는 내용입니다. 그 "문화상대주의"의 생생한 모습에 대해, 이 책처럼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책을 여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1) 손창남 저자께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며 책을 쓰셨고(독자 입장에서 전달이 잘됨) 2) 저자의 진솔한 체험이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르고 공감이 잘됩니다. 적당히 가공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슬쩍 고친 책은, 이런 감동을 전달할 수 없죠.

 

손창남 선교사님의 전작을 읽은 독자는 다 알지만, 저자께서는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해 오신 분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엄청나게 인구가 많은 곳이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라고는 하나 매우 세속적인 경향의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므로, 이웃 필리핀에 비해 기독교 신봉 인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죠. 이런 곳에서 오랜 기간, 교육(회계학 교수님입니다)과 선교를 동시에 진행한 분이라, 신앙 외적 측면에서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생생하고 진솔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계십니다.

 

이번 책에서는,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인도네시아는 고맥락 문화"의 사회라는 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시더군요. 예를 들어 가사도우미를 해고할 때(이유는 절도 등입니다), 인사를 안 받아 준다든가, 평소에 베풀던 대접을 안 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눈치를 줍니다. 그러면 도우미는 무슨 뜻인지를 알고 제 발로 나갑니다. 이렇게 해야만, 해고 당한 이가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고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체면을 지켜 준 것으므로, 마음이 찜찜한 바가 적습니다.

우리는 아주 다르죠. 그 당사자가 평생에 잊지 못할 만큼 혼쭐을 냅니다. 사안이 중대하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한국은 이후 고용 계약상의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안을 분명히 정리하는 게 나으므로, 이런 저맥락적 문화가 발달한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당장 내가 분한 건 무조건 그 자리에서 표현을 해야 내 직성이 풀리는" 미숙한 심성의 탓이 더 큽니다. 이 경우, 남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진국 미개인으로만 알아 왔던 인도네시아인보다 훨씬 못한 면을, 이 책에서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 선교사님은 물론 "우리가 이런 점은 그들보다 못하니, 그들에게서 배우자."라고 말씀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저자는 그저,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가치가 통용된다"는 점만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예전 양반 문화, (좋은 의미에서의) 체면 문화가 통할 때는 얼마든지 이런 아름다운 풍속이 사회를 지배할 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화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물론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는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풍습이 간데 없이 사라지고, 웬 나쁜 악다구니만 남아서 민족성인 양 탈바꿈한 현실이 개탄스러웠다고나 할까요.


손창남 저자께서 회계학을 가르칠 때, 부정행위를 한 학생에게 공개 주의를 준 것도, 그런 의미에서 현지에선 크게 꺼려지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조용히 경고를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인도네시아에서만 통하는 방법이겠습니까? 또 하나, 서울에서 유학을 할 수 있게 선발된 어느 여학생이, 살짝 손 선교사님을 찾아 와 "사정이 있어 못 갈 수 있는데, 다른 학생을 보내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해 왔답니다. 저자는 당연히 양해하고 다른 학생에게 기회를 주었지요. 그런데 이는, 처음 선발된 그 학생이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일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레 겸양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사양했는데, 선교사님이 가라고 하시지 뭐야?"

어쩌면 이는, 단지 문화의 차이에만 기인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현지인의 마음에 접근하려는 시도 없이, 그저 피상적인 소통에 머무르려 한 자신의 잘못일 수 있다고 저자는 토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사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상대의 영혼을 일깨우는 선교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음은 덥썩 받고만 싶지만, 예의상 명분상 일단 몇 번 사양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 좋은 미풍양속이, 저 먼 열대의 인도네시아도 같은 동양권으로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데, 우리만 어딘지도 모르게 내동댕이치고 만 것이죠. 읽으면서 거듭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를 한다면서, 본국에 보고(報告) 편지를 쓸 때마다 한국 험담을 후렴처럼 쓰곤 하는 영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손창남 저자께서는 이를 볼 때마다 극히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때마다 자제하셨다고 합니다. 어느날 기회가 생겨 이를 지적하자, 그 선교사는 "내가 그러고 있는 줄 몰랐다."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 선교사님이 이끌어 낸 결론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인도네시아의 형제들을 우습게 보는 행동을 하고 있었을 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시네요.

 

일단 저는, 선교사라는 분이 현지인을 우습게 하는 행동과 말을 그처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자체가, 소명 의식이 결여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진료하는 환자, 의뢰를 맡은 고객, 가르치는 학생의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모두가 다 기본이 되어 먹지 않은 이들입니다. 하물며 선교사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저자는 "나 역시 그러고 있었을지 모른다"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동양적 의미의 "군자적 인격, 태도"가 보이는 처신입니다. 가장 안 그러실 것 같은 인격자가 오히려 자신을 탓하고, 가장 천박한 인격자가 허위로 남을 고발하는 법입니다. 선교의 기본, 아니 더 나아가 외지인을 대하는 기본 자세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 보는 겸허한 자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서양 선교사의 행태에 분개하기보다, 저자의 겸손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저자가 그저 양순하신 성품인가 하면, 한국인들이 예의가 바르다는 주장에 대해, "일본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은 영향이다."를 가당치도 않게 들고 나오는 어느 일본인의 주장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 자리에서 시정이 되고 사과를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구요.

 

저자는 인도네시아어를 상당히 잘 구사하시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현지인이 아니기에, 틀린 어법 구사로 학생들에게 웃음을 사고(아무래도 대학 과정 강의이므로 그럴 수밖에요). 소통이 안 되다 보니 조교가 대신 시험 출제를 하겠다는 제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그는 "앞으로 내가 틀린 표현을 하면, 적어서 제출해 주는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겠다."는 방침을 정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러니 괜한 웃음으로 수업 분위기가 나빠지고, 권위가 실추되는 일도 줄어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일품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그들 사이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방법도 좋지만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이 더 멋집니다.

 

어느 가톨릭 신부와 이런 대화를 나누신 경험도 들려 주고 있습니다.
"신부님,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불을 붙이려 하지 말고, 부채질만 하십시오. 불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드신 인간인데, 이미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는 그 척박한 영혼 안에 다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싹이 튼 자리를 마다하고 엉뚱한 지점애서 새 불을 만들려 하면, 기존에 자라던 심성마저 망칠 수 있습니다. 이미 자라고 있는 그 불씨를 찾아, 요령껏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그 요령을 알려면, 그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선교에 국한한 이치겠습니까? 인간 사는 세상, 소통이 이뤄지는 근본의 철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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