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32가지 물리 이야기
레오나르도 콜레티 지음, 윤병언 옮김 / 작은씨앗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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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어느 베스트셀러 저자가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과학 본연의 연구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더 중시하는 듯한 카이스트 출신의 그 저자의 작업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스토리가 있고, 감독이나 제작진 중에는 대학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때에는,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게 미학적 감동 외에도, 모종의 과학적 맥락의 전달 역시 있게 마련입니다. 캐릭터나 피사체가 움직이기도 하고(영화를 영어로 하면 motion picture입니다), 스토리(영화가 품고 있는) 중에서 스토리(예컨대 정재승 박사의 이야기)를 뽑아 내는 건,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어려운 과제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motion picture)가 아니라, 그냥 회화(picture)에서, 그 그림을 해석하고(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야기를 풀어내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한정된 공간 안에서 구현된 구상 혹은 추상에서 "과학을 본"다라? 그건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그린 그 거장들의 의도도 그게(과학의 구현 같은 것) 아닐 뿐더러, 정지된 이미지 한 컷에서 그 복잡한 수학적 구상이 개입해 있는 원리를 줄줄 풀어낸다... 물리학에 통달한 이에게도 힘든 일 같고, 회화와 미술사에 어지간히 밝은 이에게도 어려운 일 같습니다. 두 분야에 다 도가 튼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지도 않겠거니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둘을 동시에 엮고 버무려 가면서 "썰"을 푸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저자 레오나르도 콜레트는 본분이 물리학 연구직입니다. 이탈리아 트렌토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현직 교수이며, 미국 물리학협회 APS 회원이라고 책 소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 입에서는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주제가 바로 회화의 역사, 기법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이 책에서, 미술사상 특정 유파나 조류에 속한 작가나 작품만 거론하는 게 아니라, 다빈치나 카라바조에서 마네와 샤갈, 오토 딕슨에 이르기까지, 정말 아무 공통점도 서로 갖지 않은 거장들을 32명 뽑아 놓고, 말 그대로 그림과 물리학의 역사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썰"을 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아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 어린 학부생들을 상대로 교양 강의차 들려 주던 내용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제를 전달하는 형식은 두 남녀 대학생(아직은 본격 사귄다기보다 썸타는 정도로 보이는 사이)의 대화로 꾸려져 있더군요. 남자 대학생이 물리학을 설명하고, 여대생이 그를 이해하는 위치에서 둘은 신나게 말을 주고 받으며, 독자와 저자의 사이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해 냅니다. 대화는 유머러스하고 화기애애하며, 특히 프란체스카의 날카롭고 당돌한 질문은, 파올로의 도도한 논변을 힘겹게, 때로는 의아한 느낌으로 따라가는 독자의 심겨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습니다.

 

분리하면서 포착한다. 사실 이 말은, divide and rule을 살짝 비튼 것입니다. 파올로의 대사 중에는 "포착"이 아니라 "정복"이라고 되어 있고, 이렇게 읽으면 저 어구와 거의 일치하죠. 물론 저자는 어지간히 진보 성향의 스탠스라서 그런지, "정복"이라는 단어가 전달할 수 있는 의미가 그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님을 구태여 여러 번, 변명하듯이 덧붙입니다. 이런 책을 읽는 독자가 그런 오해를 할 가능성은 낮을 텐데도 말입니다.

 

저자의 입장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자는 것이었고, 이런 입장이 교조적으로 굳어 과학은, 물리학은 수 세기 동안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부분적으로 선명한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관계 없는 다른 사정과 상황을 제거하고 사실을 관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바로 사고 실험(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이며, 이 시도를 통해 "관성"이라는 것의 개념 정립이 시도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이 처음 자리잡았다."
"근대 과학은 이 갈릴레이의 시도를 기점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일 수 있었으나, 이후 플랑크에 와서 한계에 부딪혔고(소위 양자성의 문제), 비로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으로 복귀할 필요성을 일부 느끼기 시작했다."


이 모든 주장을 저자는 움베르토 보초니의 <동시적 착상> 한 폭의 그림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저 표현들은 제 느낌과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책 원문과 차이가 있을 수 있고요)

 

옳은 말이고, 이 1장은 이후 계속 이어지는 뉴턴의 고전 역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있어 토대와 대전제를 이루는 내용이라서, 독자는 반드시 읽고 지나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발췌독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명작 32점은 그 배열에 별반 필연성이나 깊은 의도가 없지만, 그 명작 32점을 모티브로 하여 펼쳐지는 과학사(이 책 내용은 과학 이론 현황 설명이라기보다는 과학사 해설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폐기된 에테르論, 플로지스톤 說도 등장하니까요) 설명에는 반드시 시간적 맥락(어떤 이론이 무엇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과학사에 이미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도, 저자만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개념어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발췌독 형식은 어렵습니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과정, 혹은 과학이라는 정신 작용을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분명 저자는 상대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주제를 소화하고,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충격을 받은 건, 저자는 "원자" 개념에조차도 얼마든지 향후 붕괴할 수 있는 가설 정도의 위치 이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는 돌턴식 개념은 타파된 지가 한 세기가 넘었습니다만, 적어도 "원자"라는 단위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에는 아무에게서도 이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저자는 그러나, "원자 역시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으며, 더 유력한 설명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설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원자는 끈(혹은 초끈) 이상의 실감이 나는 개념도 못 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나오는 중입니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건,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였던 그 모든 도그마를 손쉽게 버릴 줄 알아야 대가라고 할 수 있다"더군요.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을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런 갈릴레오의 관성 개념이나 원운동 역시, 뉴턴에 의해 전면적으로 비판, 수정되고야 말았습니다. 저자가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서양 회화 역시 관점과 스타일을 그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고 발전시켜 오다가, 어느 천재(마네나 마티스 등)에 의해 송두리째 버려지고 전혀 새로운 기법, 스타일이 만들어지면서 발전해 온 사정이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요. 그냥 과학 이야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그림까지 끌여 들여 온 건 그런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기 스승(티코 브라헤)를 충실히 섬긴 걸로 유명한 케플러, 그리고 교회와도 큰 마찰을 빚지 않고 무난히 넘어갔던 케플러에게서 "혁명가, 파괴자"의 성격을 찾는 건 좀 힘들어 보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갈릴레오의 원운동 개념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타원 운동설을 정립한 그야말로, "틀린 것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진정한 혁명적 과학자의 자격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저 케플러가, 티코(이 책에서는 "튀코"라고 표기합니다. 그게 정확하죠) 브라헤와 갈릴레오라는 두 神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 뿐 같습니다만.

 

이처럼, 모든 이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히 다은 이론을 내어 놓음으로써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런 말은 없습니다만 독자로서의 제 해석)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니,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빠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카라바조의 <바울의 회심>을 두고, 회심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빛"을 가득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보통 권위 있는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내려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거의 꿈보다 해몽이라고 될 만큼, 이 걸작을 놓고 풀어지는 설명은 저자 특유의 물리학사 해설이 주종을 이룹니다.

 

예컨대 저는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두고, "사실주의적 결함"을 들고 나오는 저자의 태도에서 과연 물리학자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총을 쏘는 군인들이 꼿꼿이 서 있느냐는 거죠. 물론 이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은 아닙니다. 인상파 작가들이 처음 나올 때부터 받은 비판이 바로 그런 류였습니다. 마네는 처음부터 "그 꼿꼿한 인상"을 포착하여 전달하려 했던 것으므로, 아무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탁월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개인으로서 막시밀리안 1세(멕시코의)를 두고 저자가 너무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황제로서 실권을 가지지도 못했고, 나폴레옹 3세의 농간에 놀아나 대신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었죠. 빈민과 약자에 대해 대단히 온정적이었고 굳이 사지로 가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남자답게 군주답게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좀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했습니다. 물리학자는 물리학 이야기만 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이 장에서 펼쳐지는 작용 반작용 설명은 대단히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사울의 죽음>은, 제 개인적으로 가장 탁월한 챕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보이는 무수한 창날을 보고 "벡터"를 떠올린다든가, 울퉁불퉁한 지평선의 완급을 보고 함수의 개념을 설명한다든가 하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면 참 유익한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역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게, 벡"터"와 전쟁"터"를 갖고 벌이는 언어 유희가 일품이었네요. 어원적으로는 전혀 무관한 두 단어인데도 말이죠.

 

아쉬운 건, 그림 사이즈가 작아서 저자의 의도, 설명을 그림과 함께 대조해 가면서 읽기가 불편했다는 점입니다. 하긴 개인적으로는 그림 많고 텍스트 적은 책을 좋아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책에 대해 불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입장이 다른 독자도 있을 것 같고요. 정 그런 분은 인터넷에서 해당 작품을 검색하면 큰 해상도의 파일이 쉽게 구해질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은, 이 책은 명화를 해설하는 책이 아닙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다른 책에서 알아 보셔야 할 것 같고, 이 책은 그림 하나를 구실(?) 삼아, 지난 물리학의 역사 자취를 짚어 가고, 바람직한 과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은근 강도 높게 설파하는 "과학책"이란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탈리아인이라서, "전화의 최초 발명자"를 두고 A G  벨만 꼽지 않고, (우리가 잘 모르는) 메우치(미국식 발음으로는 메유치죠)를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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