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을 보다 - 그리스.로마 신화보다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성경을 보다
찰스 F. 켄트 지음, 장병걸 옮김, 우수호 감수 / 리베르스쿨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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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신약성경을 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해석을 통해야 하는지가 너무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예 를 들면, 너무나도 쉽고 친절하게 쓰여진 이 책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표현을 두고 저자분이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리, 과학 시간에 "지구가 둥글다"는 걸 배우는 어린 학생들은, "둥근 지구에 끝이 어디 있을까?'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교양과 신앙의 인식 사이에서 어린 독자들이 고민하지 않게, 이 책 p253에서 합리적이고 공평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무수히 많은 교파가 나뉘어 실재하는 것도, 이 해석을 놓고 어느 쪽을 따를 것이냐로 입장이 서로 다른 이유가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설사,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교파 안에서라고 해도, 구체적인 구절을 두고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견이 일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독자(신도이든 아니든)들은, 성경도 텍스트인 이상 스스로 지니고 있는 내러티브, 스토리가 대체 뭔지 대강이라도 파악해야 하는데, 원전은 그런 접근조차 쉽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죠.


저자 찰스 켄트 박사의 백 년 전 고민은 두 가지였습니다. 1) 모근 기독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 격 스토리라인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2) 그것을 어떻게, 어린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것인가.


켄트 박사의 접근은, 일단 "성경"이 아닌, "성경 이야기"를 아동 문학처럼 구성하여, 이야기로서의 "예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사연"을 구성해 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여기에다가, 중세 이후 유럽의 쟁쟁한 화가들이 남긴 불후의 걸작 중 신약 성경 관련 작품들을, 헤당되는 "장면"에 적절히 배치하여 이해를 돕는 것(그리고, 경우에 따라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것)을 그 편집 의도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고 그가 배출한 사도들이, 팩트상으로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에 대해 아주 쉽게 아웃라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구요. 또.... 그런 목적이 꼭 아니라도, 이렇게나 유명한 화가들이 제작한 명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습니다. 화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참 우리가 익히 아는 화가들이, 이런 그림도 남겼었구나 하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란 단지 붓과 물감, 캔버스를 다루는 테크닉이 대단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어요. 종교를 떠나서, 이처럼 구상(具像)의 창조로 인간 영혼을 깨우고 감정의 가장 고상한 부분을 격동, 고양시키는 마법, 그것이 화가의 본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히로니뮈스 보스(히에로니무스 보슈)는 최근 우리 나라 독서인들에게 워낙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만 각인되어서(정통 미학서에서건 스릴러에서건), 지극히 평온하거나 그저 온건한 기적의 경이를 표현한 작품에서조차 뭔가 아주 살짝은 괴기스러움이 묻어 나옵니다. p43의 <가나의 혼인 잔치>를 보십시오. 한쪽 구석에서는 경사에 이은 기적(물이 포도주로 변함)을 맞이한 이 순간에서도, 뭔가 다음에 좌중을 어수선하게 할 트러블이 닥칠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다른 구석에서는 물동이에서 부대로 옮기는 남자의 표정이 그저 침착하기만 합니다. 세상은 본디 아우성과 정적이 공존하는 곳이고, 그 한가운데에 첫 기적을 행한 인자(人子)가 좌정(坐定)해 있습니다.




 

p145에 보스(보슈)의 그림이 또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입니다. 오른쪽 상단의 어느 구경꾼의 표정이란 너무도 사악하고 흉칙하여, 마치 이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러 쓰이지 않았나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2003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역시, 구경꾼 중에 자리한 악마의 얼굴을 장면에 꾸려 넣을 때, 이 보슈의 작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벌인 토론이 바로 그 천재성(?)을 잘 드러내는 일화죠. 성경 텍스트에는 한결같이 그 어린 지성(과 영성)의 완숙함에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뭔가 불안한 이미지의 조성으로 어디 가서 안 뒤처지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속(이 책 p26)에서는, 어린 예수를 둘러싼 자들의 표정이 각양 각색입니다. 어떤 자는 경탄하고(영어 성경에 "marvel"이라는 표현으로 잘 나오는), 어떤 자는 시샘 가득한 표정의로 회의(懷疑)하며, 어떤 자는 이로부터 삼십 년 후 광장에서 소리 높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를 외칠 준비라도 하듯 벌써부터 목청을 가다듬는 품이며, 어떤 자는 마치 광야에서 세 가지 질문으로 성자를 유혹하는 예행 연습이라도 하듯 그윽한(?) 표정을 곁에서 짓고 있습니다. 참고로 반 천 년 전의 이 작품 속에 나온 얼굴(아마 모델이 있었겠죠?)과 우리 동시대 모 배우의 모습이 서로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는 주로 우화를 통해 대중을 깨우치려 했습니다. 그 중, 신의 공평하고 제한 없는 무조건의 사랑을 표현라는 에피소드로, "돌아온 탕아(Prodigal Son)"의 이야기가 있죠. 이 이야기는 단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배덕의 시절을 보낸, 그리고 염치 없게도 다시 돌아오기까지 한 아들을, 아무 책망도 없이 용서하고 안아 주는 아버지의 부성애만 표현한 게 아닙니다. "성실한 장자의 불평"이 곧이어 제기되고, 그런 큰아들에게 "나의 것은 이미 다 너의 것이거늘 무엇이 서운할 게 있겠느냐?"며 다독이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한 번의 추가 감동을 더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 곱이 결국 완전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그 아버지 이삭은 기만을 당한 채 숨을 거둔 구약의 마무리와 비교하면, 이 신약은 확실히 포용적이고 건설적이며 보다 보편적인 지향점을 마련합니다. 책에는 렘브란트와 무리요의 그림이 나와 있으나(pp93~94), 저는 탕자가 보다 잘 놀고 보다 더 회개 안 하게 생긴 리오넬로 스파다의 그림을 여기 옮겨 보겠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종족 안에서만의 편협한 율법과 선민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신의 고귀한 형상을 본받아 창조된 모든 인간에게 공히 희망과 죄사함을 약속하는 범인류적인 것이었음을 역설합니다. p273을 보면, 유대인 특유의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이방인(Gentile)을 차별하 지 않고 널리 공동체에 맞이할 것을 권한 그의 정신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 2부 이하에서 나오는 사도들, 그 중에서도 바울의 행적, 지중해 동안과 로마를 왕복하며 "기쁜 소식"을 민족과 언어에 관계 없이 두루 전하는 그의 모습에서 잘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이 바울이라고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는 지중해 세계에서,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도덕과 윤리, 내세에의 희망, 속죄와 거듭남의 비의를 민중에게 가르쳤습니다.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별을 좊아 그를 발견한 동방박사들의 각별한 축복과 경배가 있었고, 스스로 자처하여 십자가에 달려 폭압적 정치 권력과 잔혹한 무력 통치를 가장 초연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력화한 그는, 그를 신으로 고백하는 이에게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건, 전 인류를 위한 영원한 슈퍼스타로 남을 것입니다. 꼭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츤데레한 신앙 고백 형식이 아니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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