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시인의 보는 눈은 청아하고 순수합니다. 시인이야말로 예전 플라톤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물 속에 감춰진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지나치는 사물들도, 시인의 눈에는 그 속에 몇 겹으로 숨겨진 비의를 내포하고 있고, 지난 삶의 자취를 증언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예언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또한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진리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 독일의 피터 빅셀은 "책상은 책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한갓 책상도 그를 책상이라고 보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초심으로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사르트르는 돌이 돌이고 보도블럭이 보도블럭일 뿐일 깨닫는 순간, "그 지독한 일상성과 무의미성에 구토가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임을 깨닫는 게 돈오돈수의 요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식을 가진 우리 인간이란 존재와 가장 친하면서도 가장 이질스러운 존재가 사물입니다.

 

사물과 대화를 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됩니다. 사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사물을 응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사물은, 이제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의 스승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 뮤즈와 가장 친함으로써 천상의 신비에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시인들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판>에 연재되던 52주 동안, 여성의 글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마침 그 회분을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고, 책이 나오기 전에는 으레 다른 여성 시인의 글도 그 52주 동안 몇 번은 이뤄졌겠거니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유일한 연재분이었다는 게... 그 뿐 아니라 이 책 중에 유일하게 대화체로 쓰여진 글이기도 합니다. 사라 베른하르트와 레너드 코언의 대화. 코언이 베른하르트를 보고 누나라고 부르늕데, 누나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무려, 그녀가 죽고 나서 십 년 정도 지나서 코언이 태어났으니... 영혼 사이의 대화라고 부르기에도 좀 뭣한 것이, 코언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누는 크리스마스 실에 대한 대화는 좀 웃기면서도, 크리스마스 실이 풍기는 그다지 따뜻하고 정겹지 만은 않은 묘하게 산업화한 냄새를, 가내 수공업의 비인간성에 빗대어 가며 묘한 여운을 남기는 모습입니다.

조영석 시인은 야구팬입니다. 1976년생이니 이 책이 실린 분들 중에서는 중간, 혹은 그보다 조금 젊은 편인 나이겠습니다. 그는 서울 출생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를 좋아했고, 선동열을 "데모 할 때 짭새에 잘 대항할 수 있겠다"는 이유로 부러워하는 정서를 가지는 세대이기도 한가 봅니다. 야구공을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냉소적으로 "베이스볼 볼"이라 대답한다고 합니다. 마치 검은 칠판을 "블랙 블랙보드"라고 한다는 엉터리나 비슷합니다. 해설가 하일성의 말처럼, 아무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야구입니다.

 

이원 시인의 말을 보면, 이어폰은 귀도 아니고 귀 바깥도 아닌 "유희의 연장'이라고 합니다. 이어폰은 분명 귀에 부착될 때 귀를 닫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어폰을 착용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귀를 닫으려는 게 아니라,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어폰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확장이요 세상의 접근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말을 하기보다 귀를 여는 게 우선의 이치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병록 시인은 간판에 대한 깊은 사색과 추억을 동시에 털어놓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아는 시골에선, 가게 간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세운 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하나, 양두구육을 자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 아는 사람들끼리, 간판에 정해진 용건 이상은 취급 안 하는 각박함을 드러내거나 융통성 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간판은 결국 한 편의 시입니다. 맞춤법이 틀려도 그건 그것대로 정겹고, 간판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을 과연 가게 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지, 정반대 인상의 주인이 나오지는 않는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사물은 결국 다차원의 존재입니다. 나의 시선, 나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비로소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고,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나에게 고유한 의미로 다가온 사물은, 이제 소통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어느 새 그 친밀은 나를 넘어 우주로 전파되고, 세상은 자와 타가 구별되지 않는 통일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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