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더 웨딩
신디 츄팩 지음, 서윤정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사는 게 시트콤이다."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  발랄하고 긍정적인 모습이, 주위에 웃음을 줄 때 쓰는 말입니다만, 이 말에는 마냥 칭찬하 의미만 담긴 게 아니라, 걱정과 황당함의 뉘앙스도 어느 정도 풍긴다고 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저 일상을 사는 분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면, 그 이웃을 좀 부담스럽게 하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그 당사자가 진짜 인기 시트콤을 집필하는 방송 작가라면 어떨까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품 세계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나 보다." 같은, 다소 진지한 각성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 샌디 츄팩이 바로 그런 장본인, 그의 작품을 본 시청자가 잠시 독자가 되었을 때, "이게 바로 그 시트콤의 실사 버전이군."하면서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본 시청자의 반응은 사실 좀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슬슬 폐경기를 맞이하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끝나간다는 초조함에 애써 더 일상의 즐거움을 찾으려 들고, 때로는 오버액션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불꽃처럼 연출하는 그 숱한 "된장질". 이런 걸 보고 대리만조을 하시는 층도 있고, 그 활짝 벌려 웃는 웃음의 부작용으로 깊게도 패이는 (주연 배우들의) 주름살을 보며 불편함에 살짝 고개를 돌리는 저 같은 느낌도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근데 대체 그런 감성, 위트, 표현의 묘미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신디 츄팩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그 모든 캐릭터들을 낳은 어머니, 아니 차라리 캐릭터들 자신으로서, 작가 한 명이 실물로 존재함을 알린 적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신디 츄팩이 어떤 스펙이며 사생활이나 개인적 배경이 어떻다 하는 것도, 이미 연예인 못지 않게 호사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가십거리가 되어 있는데요. 이 책은 이제 재혼 8년차에 접어드는 그녀의 "오피셜 스토리"의 시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의 배우자 이안 왈락을 만나고, 결혼에 골인하며, 그 후 몇 차례의 고비(라고 그녀는 말하지만, 사실 심각한 건 없습니다)를 어떻게 넘겼으며, 근황은 어떠한지를 자세히, 좀 너무 자세히 털어 놓고 있습니다.

 

책은 그들의 첫 만남, 그리고 대단히 열정적이고 달콤했던 연애 기간(신디 츄팩이 나이가 있다 보니 이 기간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식 결혼 생활, 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황홀한 체험담을 맛깔스럽게 이어갑니다. 우선 처음부터, 신디 츄팩은 자신이 유태인이고, 이번 새 배우자도 유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겪었던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전 남편과 우아하게 헤어졌지만(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여전히 -자주는 아니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법적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지만, 둘 다 유태인 율법에 따른 절차를 밟지는 않았습니다. 유태 율법에 따르자면, 이혼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고 "내쫓아야(!)" 한다는데, 사실은 츄팩의 집에서 나간 건 남편입니다. 그러나 "내쫓음"의 의미는 얼마든지 융툥성 있게 해석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건 이혼장입니다. 이 이혼장은 히브리어로 "게트"라고 하는데, גט라고 씁니다. 이걸 영어로 표현하면, get a get 이 됩니다. 신디 츄팩은 상황의 꼬임도 꼬임이거니와, 이 우스운 언어 유희를 본의 아니게 지어낸 그 기막한 아이러니를 독자가 공유해 주기 바라고 있네요.

 

그 전 남편과 헤어지게 된 동기도 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힙니다. 남편이 뒤늦게 자기 성 정체성을 깨달아, 다른 남자와 살게 된 것입니다. 신디 츄팩은 이 책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털어 놓고 있지만, 여성으로서 그녀가 당시에 느낀 감정은 굴욕감 비슷한 게 있지 않았을지 짐작됩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성적 욕구,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나눌 상대를 찾아야 했고, 몇 남자와 교제하다 바로 이 이안 왈락을 만나게 되었죠.  

 

책에서는 그저 철없는 남녀가 만나 정신없이 사귀고, 서투르고 잘 안 맞는 면도 있지만 잘 맞춰 나가는 과정을, 마치 20대의 그것처럼 재미있게 써 나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츄팩의 입담이 워낙 좋아서, 우리는 그녀의 말솜씨를 감상하느라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까지 합니다(그녀의 책은 원래 이런 스타일을 즐기는 맛에 읽습니다. 처음엔 적응 안 되더라도 나중에는 빠져듭니다). 이안 왈락에 대해서 "초혼의 미남 변호사"라고만 나와 있고, 미남이다 뭐다 하는 것도 콩깍지가 씐 사람에게는 다 그리 보이는 거라서 마냥 믿을 건 아니고, 이야기 전개가 경쾌하고 가볍다 보니 그냥저냥 넘기는 분도 있을 겁니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서로에게 대책없이 반해서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녀, 그것만으로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렇게 읽으시는 독자도 많겠죠.  

 

하지만 진실은 좀 무겁습니다. 이안 왈락은 그녀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잘생긴 남성인데다, 중견 로펌에서 창업 멤버 변호사인 초고소득자입니다. 책에는 츄팩의 말로 "당신이 언제 그런거 저런거 하게 돈이나 벌어다 줘 봤어?"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츄팩 자신도 특급 작가일 뿐 아니라 이안이 상위 3% 안에 드는 특급 법조인(국제법 등 큼직큼직한 이슈만 맡습니다)임을 감안하면, 사실 독자는 위화감이 좀 느껴지죠. 이런 걸 모르고 책 읽는 분은 차라리 속이 편한 거구요. 츄팩 역시, 남자가 유태인 전문직종 아니면 상대를 안 하는 약간 속물적인 여성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애정을 듬뿍 쏟을 가족을 꾸리려는 욕망은 여느 보통 사람 못지 않아서, 당장 아이가 안 생기자 고심 끝에 애완견을 하나 들여 놓습니다. 귀여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죠. 사실 이들은 신혼 기간 중에 한 번 임신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검사를 해 보니 정상으로 태어나거나 자랄 수 없는 아이라서 부득이하게 중절이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츄팩이 나이가 많다 보니 난자 활동이 왕성하지 못해 두번째 임신이 어렵습니다. 난자 기증자를 통해 난자를 제공받고 임신에 일단 성공하지만, 전문가들도 전혀 예상 못하게 하혈 끝에 조산, 사산을 합니다. 이때의 끔찍한 경험은 자신의 시점으로 말하지 않고, 남편 이안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발랄한 어투를 이어가는 게 무리라서였겠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 난자 기증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도중에 많이 삽입됩니다. 기증자는 젊은 웨이트리스였는데, 소개서를 보니 로스쿨 지원자로서 현재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자필 작성문에 맞춤법이 왜 그리 많이 틀려 있는지,.. 츄팩은 뺑뺑 돌여 말하고 있지만, 사실 결론은 그들 부부가 이를 거짓으로 판단했다는 뜻일 겁니다. 다만, 아이의 지성은 부부가 키워 줄 수 있어도, 외적인 매력은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으니, 외모로 그냥 고른 게 그 웨이트리스의 난자였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그 전에, 직접 임신을 해 보려고 전문가에게 들인 돈만도 셀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게 되고, 이번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 번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은 그녀지만, 이 남자와는 평생을 해로하기로 결심이 굳은 것 같고, 그 증거가 바로 이 입양아겠죠. 

 

책 에는 감동적인 명문장도 여럿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제가 주목한 건 책 초반에 나오는, 츄팩이 이안과의 결혼식에서 낭독했다는 애정 고백, "나쁜 남자론"입니다. "나쁜 남자는 다음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여자가 딴 생각을 못 하게 만들고, 마침내 여자를 자기것으로 꽁꽁 묶어 둔다." 참 어디서나 잘 통할 남자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모범생 중에 모범생 스타일인 이안이 그런 나쁜 남자에 해당이 되는지는 좀 의문이지만요.  

 

이 책의 원제는,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The Longest Date"입니다. 보통 영어로 "가장 긴"이라고 하면,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워서 가지 않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당연히 아니고, 결혼 생활도 마치 연인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봐야겠죠. 저는 이미 결혼 2,3년차에 들어선 후에도, "아직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라고 말하는 츄팩에게 좀 놀랐습니다. 이는 진도가 더디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고, 상대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게 많다는 겸손함과 아낌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을 살아도 어제 만난 듯 설렐 줄 아는 그런 부부가 부러운 요즘에, 재미있고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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