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카타르
지병림 지음 / 북치는마을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처음에 책을 펼쳤을 때에는, 열사(熱沙)가 그 표면의 토양을 이루고 있는 토후국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책이겠거니 기대를 했습니다. 근래 도하가 세계 상업의 허브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고, 그곳의 부유층들이 소비하는 갖가지 트렌드가 어느 새 글로벌 스탠다드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기까지 하는 눈치기도 해서요.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가면서는,.. "아, 세상의 한 권의 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책은 그것을 쓴 한 저자의 퍼스낼리티, 혹은 영혼의 미니어처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꼼꼼히 읽으면 물론 대략의 얼개, 부분적으로는 섬?한(아무리 아름다운 피사체라도 국지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상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디테일에 놀랄 만큼, 그 카타르라는 나라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전체적으로 읽고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것은, 이 열정과 끼를 주체 못하는 여인, 저자 지병림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며, 그녀는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감성, 자신의 생각, 자신의 열정, 자신의 자취 같은 것을 이런 모습으로 전파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승무원이자 문인인 저자가 캐치하지 않았으면, 특히나 한국에 사는 여러 독자들이 결코 일생을 통해서 깨닫지 못할 카타르의 한 컷을, 철저히 그녀의 버전으로 알려주는 미디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산물의 생산성이나 효용성, 혹은 공감대의 폭은,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다가오겠습니다만, 여튼 이 책은 상당히 주관화한, 그래서 개성 있게 포착된, "지병림판 카타르"를 잔뜩 담은 책이라고 저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좋습니다. 사실 석유가 갑자기 가져다 준 주체 못 할 부(富)의 유효기간이 어디까지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저자는 그 검은 황금의 충만을 두고 "알라신의 축복"이라고까지 말하죠. 물론 현지에서도 그렇게들 광범위하게 공감하고 있을 겁니다). 하루 아침에 사정이 바뀌지는 않겠으나, 최근 셰일가스 등 대체 수단으로서의 자원 개발 탐색 노력이 활발하고(이것 자체가 투기 거품이라는 말도 있지만요), 인류는 궁극적으로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을 끊어야 그 생존의 전망이 보이는 형편이므로, 시대의 생산 구조가 개편되면 카타르는 다시 가난과 무지, 차별이 지배했던 암흑기로 침잠할지 모릅니다(과거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에도 그들은 낙후한 변방에 머물렀을 뿐 세계로부터 각광을 받은 역사가 없습니다). 그 좋은 조건을 두고 겨우 지금에서야 개발 붐이 이는 것도 그들의 둔감성을 증명하죠. 긴 역사를 두고 봤을 때 참 묘하고 드문 시점에,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격정과 시정(詩心)을 동시에 갖춘 여인의 찾고 부대낀 땅의 인상기이기에, 이 책은 대단히 유니크한 존재 의의를 지닙니다. 기대와 달리 카타르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됩니다. 한 개성 있는 여인의 내러티브를 듣고 그 내재한 표현욕을 엿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겸사겸사하여 이국의 진기한 풍습과 갖가지 군상들의 사연을 청취하는 일도 그 나름 뜻깊은 일입니다.


저는 몰랐는데, 저자는 <서른 살 승무원>같은 저서를 전에 펴낸 적이 있고, 이미 십 년 전에 정식 등단 절차를 거쳐 문협 정회원이기도 한 신분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쯤만 해도 참 이채로운 경력인데, 전작이 잘 소개하고 있듯 다소 늦었다고들 인식하는 나이(어차피 승무원은 희소한 특수 자질, 조건이 요구되는 자리이므로 나이가 문제는 아니겠죠)에 승무원 커리어를 시작한, 대단히 의지와 주관이 강한 분으로도 보입니다. 신장도 크고 외국어 실력도 탁월하실 테므로 어차피 별 문제는 안 되지만, 주위의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기란 특히 한국인으로서는 쉽지가 않다는 점에서요. 게다가, 승무원 업무가 대단히 고되다(육체노동에 감정노동까지 겸한)는 점에서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전혀 몰랐던 일인데) 국제선 타시는 분들이 이 지병림씨처럼 현지에서 그렇게 숙소를 잡고 적응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국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성격이 잘 안 맞는데다 후진국 여성 특유의 노예적인 사고 방식, 같은 여성을 더 깔보고 같은 노예식 사고에 동화하려는 이웃의 시도를 접할 때 받는 스트레스, 참 그렇게 개성 강한 분이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이 사연이란, 저자의 주관적 인상으로 어느 정도 과장된, 혹은 유리하게 꾸며진 내러티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읽어 보기도 했지만, 팩트만 추려서 재구성해 봐도 역시 그 현지 여성들의 한심한 의식구조가 빚은 문제가 더 우선이더군요. 한때 우리 한국의 여성들도 저런 불건전한 의존적, 예속적 의식에 찌들어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계적 계몽 조류를 잘도 수용하여 "세상의 반쪽" 없이는 사회가 굴러가지 못하게끔 그 위상과 비중을 늘린 한국의 여성들이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정말, "매혹의 카타르"는 고사하고, 역겨운 타르 냄새나 대하듯 그 이국에 대해 만정이 떨어졌을 만도 한데,  이 저자는 오히려 정을 붙이고 이해의 노력을 시도한다는 게 또 놀라웠습니다(혹시 책 한 권 쓰려고 거짓 감성에 자신을 던진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읽으면서 기가 찼던 장면이 한둘이 아닌데, 그 흔한 구두수선공 하나가 없어서, 대기시간 10분을 한 시간으로 만들면서 결국 구두 여럿을 결딴내놓은 사연이라든가, 엉터리 치과 치료(여성에게 치아가 얼마나 소중한 신체의 부분인데, 과감하게 현지 덴티스트에게 맡긴 그 태도는 참, 순진한 신뢰라고 해야할지 무신경이라고 해야 할지)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이 저자분 정말 특이한 분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한때의 충동 같은 것이었겠지만, 저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개종"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아마도 본디 가콜릭신자이셨던 걸로 보이니까요)까지도 생각한 바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만큼이나 카타르에 정이 들었다는 반증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만, 읽으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특히 여성으로서 무슬림이 된다는 건 종래의 나를 얼마나 많이 포기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이란 대목이 나오더군요. 거기까지 이를 일도 애초에 아니죠. 한 문화권에서 철저히 사회화한 개인이 이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  지독한 "의식(儀式) 종교"를 한때나마 수용할 생각이 들다니요. 어지간히 "매혹당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지더군요. 물론 일개 독자 입장에서이긴 하지만요. 책에도 나오지만 원시적 애니미즘도 아니고 동물로서의 돼지, 음식으로서의 돼지고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게 야만인 아니고 뭐겠습니까.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에게 영양 보급원으로 큰 구실을 해?던 삼겹살.. " 같은 말도 필요 없습니다. 즐겨 먹는 음식에 대해 무슨 변호와 논거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자연히 존재하는 것에 부자연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부정과 저주를 생산하는 그 자체가 벌써 무지와 미신의 소산인데 문명인이 거기에 왜 일일이 대응을 하겠습니까.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자연을 왜곡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을 낳고 두 발을 디디며 호흡하게 해 주는 매혹의 대지를 모독하는 자들은 비단 카타르에만 있는 게 아니죠. 저자에게 "공저"를 제안하며 "글은 내가 다 쓸테니 스튜어디스 100인만 섭외해 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자계서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타르의 옆방녀가 그저 후진 문화의 환경적 희생양이었다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소속한 문화권과 공동체를 더럽히는 분자임이 분명합니다(제가 자계서를 좀 읽는 편이지만 누구신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이 책에 나온 진상 리스트 중 옆방녀, 옆방녀 약혼자, 기내에서 추태떠는 남자 등을 제치고 단연 1위에 꼽힐 만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오롯이 간직하며 비행(非行) 아닌 비행(飛行)으로 그 나래를 펴려는 의지와 감성 앞에, 장애로 다가오는 건 중력의 법칙이나 달갑지 않은 암초, 역풍이 아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과 자연, 대지와 창공의 원색을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인과 그 감흥을 공유하려는 순결한 영혼들이 있어, 이 가이아의 지표가 매혹으로 빛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마지막 장을 넘기며 해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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