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만처럼 - 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 8
박시온 지음, 나공묵 감수 / FKI미디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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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I에서 청소년을 위한 기업인 위인전을 계속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씨를 다룬 전기를 읽었는데요, 이번에는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씨를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을 일게 되었습니다.


코오롱그룹이라고 하면 저를 포함해서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의 지명도가 상당했고,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라이벌 선경그룹이 MBC 장학퀴즈를 후원할 때 이 기업은 KBS의 다른 퀴즈프로그램(성우 배한성씨 진행)을 스폰싱했고, 1990년대초 한국이동통신이 당시 대통령 사돈 가문이었던 모 대기업으로 넘어갈 때, 017을 식별번호로 하는 이동통신 사업자 컨소시엄에 포항제철(현 포스코그룹)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현재는 많이 격차가 벌어진 상태이지만, 재계의 굴지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한, 섬유화학 분야에서 한국인의 기초 생활 품목 보급을 담당한, 국가의 기간 산업을 담당하여 오늘날의 무역대국 코리아를 일궈 내는 데에 한몫한 엄청난 기업이라는 뜻입니다.


현재는 이 코오롱그룹이, 미국 듀퐁사와의 큰 소송에 걸려 있습니다. 최첨단 소재의 특허와 미국 내 판매유통권을 두고, 기업의 생사를 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기업들이 비업무용 부동산 투기나 손쉬운 사치성, 향락성 소비재 시장의 개척에만 몰 두하여 떳떳지 못한 축재에만 몰두할 때, 코오롱 기업은 국민의 기초 생활 품목과 첨단 벤처 업종에만 역량을 전념하여,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제 길을 걸으며 사업보국의 길을 걸어 온 거죠. 이런 걸 보면 우리 한국인은 참다운 기여와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는 생각입니다.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해도 무형의 평판이라는 대상(代償)을 고생한 이들에게 부여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러면 음지에서 명분 하나로 고생할 이가 누가 있을까 싶기만 합니다.


이 책은 그 코오롱기업의 창업주 이원만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이원만은 1904년생이니, 김일성보다 8년 연상이고, 박정희보다 13살 더 먹은 나이였습니다. 이원만이 태어났을 무렵이면, 성숙기에 막 접어든 일본 제국주의는 10년 전 청 제국의 핵심전력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궤멸시키면서 동아시아 핵심 지역의 이권을 여럿 확보한 상태였겠죠? 그를 발판으로, 이번에는 전세계를 무대로 하여 영국과 곳곳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초열강 러시아와 한판 싸움을 막 열고 있을 때입니다. 이 전쟁에서, 역시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몰아 넣은, 대한해협에서의 극적인 해전을 계기로, 최강 러시아의 예봉을 무너뜨린 채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식민지에서 출생한 이원만은, 이런 시국에서 제아무리 강단있고 의식이 투철했다고는 하나, 그의 비전과 포부를 실현하는 기반을 조선 국내에서 마련할 수는 없었습니다. 욱일승천 기세의 일본으로 건너 가서, 기술도 배우고 사업 밑천도 장만하는 길밖에 없었죠.


식민지 출신은 변변한 셋방 한 칸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취업은 고사하고 단단한 일자리 하나 잡기가 쉽지 않은 게 현지의 이원만 청년이 직면한 처지였습니다. 이 젊은이의 가장 빼어난 자질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목표한 바를 포기할 줄 모르는 그 불굴의 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받아주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들의 텃세와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원하는 직장의 문을 노크하고 기어이 노른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포스트를 따 냅니다. 아무래도 청소년전기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 소의 미화와 비약이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현지의 일인들이 짐짓 취업의 문을 닫는 척 하면서, 요즘말로 3D 포스트에 전략적으로 조선인 출신을 몰아넣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원만은 expendable 신세로 떨어지지 않고, 그 회사에서 용케 핵심 기술을 배우고 또 약게 그 정수를 뽑아내어, 장래의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 놀라웠던 겁니다. 이원만은 일단 허점이 보인다 싶으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진입 장벽을 허물었고, 그 안에서 다시 힘의 한계에 부딪혔다 싶으면 살짝 잔꾀(제가 보기에는,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조선에 돌아가 큰 말썽을 만들어 당신을 곤경에 몰아 넣겠다."고 일본인을 몰아 붙인 건, 결국 대구의 지역 유지였던 친척 형 이원기의 뒷배를 의식한 점도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도 부려 가면서, 결국은 주위 모든 이들을 설복하기에 이르렀던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끈적한 생존 근성을 배울 필요가 있는 대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언 40대에 접어든 이원만은, 일본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고(이런 경우가 아주 드문 건 아닙니다. 나이로는 이원만의 아들뻘인 롯데 창업주 신격호씨도 이런 케이스죠), 패전 직전 집중 폭격을 받았던 오사카가 폐허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만의 자산만은 멀쩡하게 보호되는 행운이 생깁니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귀결하고, 조선 땅에는 해방이 찾아 오죠. 본디 정치를 했던 가문이기도 해서, 일본 현지에서 큰 재산을 모은 사업가라는 자랑스러운 경력도 생긴 그는 신생 조국에서 유력 정당 한민당(책에는 안 나오지만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등이 그 설립 주체였습니다)의 공천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다소 파격적인 언행은 선거구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선거라기보다 테러에 가까운 험악한 분위기에 밀려 결국은 석패하기에 이르죠. 낙담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붉은여왕의 법칙이 이 당시에도 통용되지 않은 게 아니라서, 그저 현재상태에 안주할 수 있었던 이원만이었으나, NYT에서 소개하는 최첨단 신소재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일론이었습니다. 이에 주목한 이원만은 대 뜸 이 나일론에 손을 뻗쳐, 이미 단단한 기반의 사업은 더욱 큰 확장을 이루게 되죠. 그런데 이원만은 여기서 남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개인의 장사가 잘되는 건 좋으나, 그 과정에서 외화 유출이 많다는 게 개탄스러웠던 거죠. "저 stretch絲 하나만 우리 기술로 직조 가능해도, 아까운 달러가 출혈하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지금 코오롱그룹이 겪고 있는 고초도 어찌 보면 창업자의 이 고지식한 경영 이념을 고수한 결과입니다. 좀 국민들이 이런 기업에는 성원을 보내 줘야 합니다. 땅투기나 하고 설탕 밀수나 하던 악덕 사업자는 결국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잘 쓰는" 복을 받고, 예전에도 굳이 편한 벌이 다 내팽개치고 험지에서 국가 건설의 일념으로 어렵게 사업하던 역군은 지금도 그 후손들조차 고생길에서 여전히 악전고투하는 중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라에 정의가 선다 할 수 있겠습니까?


1960년대 코오롱그룹이 한국에 나일론을 성공적으로 공급하지 못했으면, 한국인이 언제 의식주 최소의 욕구를 해결하고 빈곤선을 탈피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코오롱은 그저 중소기업 레벨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속지 말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진정한 공로자, 은인이 누구인지 좀 생각도 하면서 사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푼도 안되는 정치선동 프로파간다만 외우고 다닐 게 아니라 말이죠.

 

이 책은 같은 시리즈의 다른 권에 비해 내용이 재미있다는 게 특징이에요. 고 이원만 회장이 참 재미있는 캐릭터여서 일화가 많이 남은 이유도 있겠으나, 집필자가 필력이 빼어나서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한 덕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이 시리즈는 이 박시온씨가 계속 맡앗으면 하는 바람도 있네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읽기에 재미있는 책이 대중적 보급도 수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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