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첩 : 미술 명작 수첩
앤디 팽크허스트.루신다 혹슬리 지음, 박상은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수첩"으로 되어 있어 다소는 낯설어하실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화첩"이라는 형태로 대화가의 작품집을 꾸리는 일을 하나의 컨벤션으로 삼았습니다. 저술가에게 "문집"이 있다면, 화가에게는 "화첩"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마스터피스의 모음을 책 한 권의 모습으로 꾸리고 휴대하는 일은, 그 예술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뿌듯함과 전 우주를 휴대한 듯 벅찬 감격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그가 생전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든 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나 먼 후대인(이를테면 우리)들에 대해서나, 작은 창조주나 마찬가지의 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로렌초 데 메디치나 율리우스 2세를 모르는 이는 숱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만 봐도 이 말의 타당성이 입증됩니다.


저는 라루스 미술사 세트를 소장하고 있으며, 기타 예쁘고 장중한 도록집을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시로 펼쳐 봐 주곤 하는 사람입니다(미술품은, 돈이 없어, 애장하고 있는 게 없습니다만).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품어 오던 한 가지 의문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어요.

"어떻게 미술을 감상할 것인가?"

이 말은 제가 어려서 보던 백과사전의 미술편 첫머리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풍부하게 수록된 명화(그 중에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제게 모종의 생리적 변화와 설렘을 안겨 주는 아름다운 인체 묘사를 담고 있는 게 많았죠)를 비록 지면을 통해서나마, 그리고 간간히 찾을 수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제법 눈과 영혼을 통해 익힐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아직도 한 편의 미술 작품을 보고서, "와 잘 그렸다, 와 잘 빚었네?" 를 넘어, 어디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 지 속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 없었습니다. 미 술 평론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미술품 시장에서의 가격 형성과 변동에 불건강하지 않은 수준으로 영향을 끼쳐야 할 외재 변수를 마련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모두가 스탕달일수는 없어서, 걸작 명작을 두고 영혼의 충격을 올바른 방법으로 느끼는 것도 생래의 특권만은 아닙니다. 과거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이의 현대적 변용을 온전한 방식으로 터득한 스승의 코칭이 있어야, "아 나도 이제 느낌 아니까!"가 정직하게 나올 수 있는 거죠. 이의 레슨은 결국 "언어"를 통해, 다소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습득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창조는 고사하고 올바른 감상조차,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미술은 음악보다도 인문적 교양이 깊숙히 개입하는 영역입니다.


이 책은 영국에서, 고전 지식의 엑기스를 좋은 환경에서 가장 알뜰히 배우고, 여기에 현대의 최신 트렌드를 스스로의 재 능으로 익히거나 창조까지 해 내는 두 분의 동시대 저자가 쓴 책입니다. 명작 앤솔로지이니 당연히 지난 시대의 명작이 고스란히 실려 있고, 물론 명작이라도 한정된 지면에 망라할 수는 없기에 저자들의 안목이 반영된 엄선 과정을 거쳐 리스팅, 에디팅이 이뤄졌으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로, "어떻게 그림을 독해해야 하는가(일단 총체적 직관이 순조롭지 않은 이라면)?"의 원칙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좌우로 늘씬하게 벌어지는 판형에, 대체로 왼쪽에는 명작의 도판을, 오른쪽에는 저자의 해설을 담았는데, 이 해설 부분이 기가 막히다는 뜻입니다. 글을 글로 푸는 일(문학 평론)보다, 다른 매체와 분야인 그림을 글로 푸는 작업이,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더 절실한 필요성과, 수요를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이 책을 보면서 절실히 들었습니다.


이 책의 빼어난 점은, 그림(or 조소)과 그 창조주에 대한 알뜰하고 핵심 있는 해설 외에, 다른 이의 명언을 함께 수록하여, 일종의 아포리즘 컬렉션까지 겸하고 있다는 거죠. 아주 속물적인 의도로,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 "미술에 관한 그럴싸한 명언"을 주제에 맞춰서 그때그때 찾아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잘난 척하고 싶을 때 명언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명언을 적시에 써 먹지는 못한다면, 오히려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건데요, 이 책은 시대별로 그림을 죽 나열한 체제가 아니라, 키워드 주제어에 의해 카테고리를 나눠 놓았기 때문에 , 처한 상황에 맞춰 요령껏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 책은 동양권 작가의 작품들도 고루 싣고 있어 더 마음에 듭니다(물론 우리 조상들의 솜씨라든가, 유사한 풍의 작품이 빠져 아쉽습니다만). 보시면 가스시카 호쿠사이의 <어부 아내의 꿈>이 나오죠. 참 대담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감이 우선입니다.  책 맨 뒤에 나온  <가나가와의 거대한 해일>을 그린 화가와 동일 인물입니다.


이 그림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 전집의 어느 한 권에 뒤표지 디자인으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묘한 우연입니다.



아래 그림 중 왼쪽 컷은 이 책 p158, p160, 두 군데에 실려 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입니다.

(책에는 "죽은 예수"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같은 화가의 <십자가형Crocifissione>입니다.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으나, 예수의 처형을 다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므로 다들 아실 겁니다.

이 책의 저자는, "왜곡"이라는 챕터에서 이 그림("죽은 그리스도" . 左)을 다루며, 원근법이라는 혁신의 기념비적 등장을 알립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토록이나 당연한 테크닉이, 이처럼 입체적이고 분류사적인 조망 아래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오는 거죠. 오른쪽 그림에서도 원근법과 소실점 기법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미술 작품의 구체적인 기법을, 역사적 맥락과 동시에 전달하고 있어, 구경이 아닌 공부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자, 어디 가서 미술 좀 안다고 잘난 척 하고 싶은, 속물적이지만 귀여운 당신, 이 책을 주머니 안에 두고 마음껏 비서로 부리십시오, 스마트폰이 못 해주는 일을 이 친구가 해 줄 겁니다.

어 디 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요란하게 떠벌이는 모습 몹시도 혐오하며, 나 자신과 절대자 앞에 떳떳한 순수 내공만을 기르고 싶어하는 착하고 고상한 당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십시오. 앞의 녀석보다 이 책은 오히려 당신께 필요합니다. 집에 있는 두꺼운 책 일단 젖혀 놓고, 눈높이에 맞는 레슨을 해 줄 이 책을 당신의 진짜 스승으로 모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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