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묵시록
최희원 지음 / 청조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 현대사 IT, 사회 분야에 인상 깊게 남은 사건 중 하나가 있습니다. 1994년 청와대를 사칭한 어느 해커의 대규모 사취 사건이었는데요, 그 컴퓨터 작동 실력을 높이 평가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이례적으로 그를 그룹에 특채하기도 했습니다. 해커라는 단어가 일반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계기라면 아마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세월이 그 이후로 흘렀습니다. 아마 사건의 화제가 되었던 그 정상급의 해커까지는 몰라도, 당시의 그저그런 수준의 해커라면, 요즘의 일반인보다 시스템의 이해가 뒤처질지 모릅니다. 세상은 그간 단순히 양적으로만 팽창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상이 환히 열어젖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질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해커라고 하면 아마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간의 모든 테크닉을 그저 평범한 걸음마 수준으로 낮춰 버리는 초 사이언 급 해커이든지, 아니면 시중에 흔하게 널린 매뉴얼 몇 권만 읽고 어설픈 영웅심리에 젖어 겁도 없이 범법을 저지르는 철부지든지.

이 책은 가공할 만한 스케일의 배경을 바탕으로, 현시대 최첨단의 전술 구사 수단이 된 각종의 전산 테크닉을 몸에 익힌 천재들, 그들 중 일부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인재를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부패 정치인과 악당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기술 체계와 세상의 발전상을 재해석하여, 적그리스도에 준하는 사악함으로 세상을 망치려 드는 세력을 저지하는 어느 양심적인 과학자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적혀 있습니다.


리 뷰가 스포일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제가 신나게 읽은 소설의 독후감을 후기로 적을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집니다. 이 책 역시, 초반에 전개되는 살인사건들과 의문투성이의 사고가, 정확한 배경이 미궁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재밌어지고 독자의 궁금증이 커집니다. 소설의 빼어난 점은, 우리가 미처 상상도 못할 엄청난 테크놀로지의 집적이 특정 세력의 영구 집권 음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해 주는 것입니다. 생체칩이란 개념은 이미 사고나 생래적인 원인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 이들의 치료, 재활 수단으로 그 길이 열려 있고, 이의 활용 가능성은 어느 정도 보편적 상식이 되어 있죠. 웨어러블 컴퓨터도 최소 십 년 내에는 상용화의 단계에 진입할 것이고, 구글 글래스(안경+스마트폰)의 등장은 얼마 전 큰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교묘히 숨겨지는 도청 장치는 이미 우리 생활에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적발해 낼 것인가를 두고 경찰이 크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뉴스에 낫었구요. 이처럼,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각종 피처들은 그리 새롭거나 놀라운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을 소설 하나에 잘 버무려낸 것은 작가의 솜씨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지고 익숙한 사실들이지만, 그것이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처럼) 사악한 손에 한꺼번에 장악되기라도 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또 이 소설처럼 기발한 가상 공간, 내러티브가 창조될 수도 있는 거겠죠.


역시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젊고, 잘생기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정의감으로 가득한 젊은 층입니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자가 주를 이루기도 하는데, 이는 이 소설과 소재인 게임이 <요한계시록>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인 때문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신원이나 주변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작가는 각별하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제와 무관한 가상의 엔트리일 뿐이라고 밝혀 놓았습니다만, 저는 읽으면서 최소한 그 지명들은 실제의 어느어느 곳들을 연상하게 되더군요. 이 소설은 현대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빼놓고는 그 묘한 분위기의 창출이 어려울 만큼, '서울스러운' 아우라가 지배하는 스토리였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국제 무대를 넓게도 활용하는 글로벌 배경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소설에 나온 대로, 아마존은 세계에서 가장 긴 (혹은 2위라고도 하지만) 강이니만큼, 남미대륙 중에서도 대서양 아닌 태평양에 면한 페루까지 그 유역이 미치는 대단한 범위입니다. 이 아마존의 오지 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곳이 바로 강 목사가 선교지로 삼은 소설 속 그곳이죠. 작가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다면 등장시키기 힘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습니다.


소 설의 결론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악당이야 제 갈 길(?)을 가고 맙니다만,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 넣고 말 뿐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과학기술을 적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 왠지 뇌과학 쪽에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과연 이대로 기술을 분별 없이 발전시키기만 해도 되는 건지....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느낌도 살짝 받았구요.


읽으면서 불편했던 건 오타의 잦은 등장이었어요.

108 고생은 세팅하느라 선배님이... → '고생은' 다음에 마침표가 찍혀야 의미가 전달됩니다. 안 그러면 선배가 고생을 세팅했다는 뜻이 되죠.
117 태호가 알려준데로 → 대로
146 일년인 된거야 → 일년이
150 매쾌한 → 매캐한
175 33을 앞뒤로 놓고 사선이라고 한 건 죽을 고비지만 → '놓고' 다음에 쉼표가 안 찍히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79 주검 → 여기서는 '시체'가 아니므로, '죽음'이 문맥상 맞다고 보입니다.
187 뭐 길래 → 띄어쓰기를 하면 안 되죠.
197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을 →선마이크로시스템즈를. (저도 이 글자를 치면서 '을'로 순간 오타가 났지만요)
198 소설에 → 소설의
249 운영체재 → 운영체제


이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 정도만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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