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불되지 않는 사회 - 인류학자, 노동, 그리고 뜨거운 질문들
김관욱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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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직장에서 혹은 자신의 가게에서 허리가 휠 만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생계를 이어가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 그런데 이런 고귀한 노동이 과연 그에 합당한 대가가 치러지며 지속되는 걸까요? 지금 당장은 지불이 유예되더라도 언젠가는 정당한 반대급부가 내 계좌에 입금되려니 하는 기대를 갖고 우리는 고된 일상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p88. 로렌 벌렌트의 <잔인한 낙관>)가 종국에 가서는 배반되고 만다면, 우리는 시스템에다 더이상 헌신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북뉴스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는 p32에서 김영선 박사의 2022년작 <존버 씨의 죽음>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존버는 물론 우리가 인터넷 등에서 쓰는 속어 존버를 가리킵니다. 1990년대에는 파트릭 쥐스킨트가 지은 소설의, "그러니 제발날 좀 가만 내버려 두시오!"라 했던 좀머 씨(Herr Sommer)가 시대정신 일부를 대변했다면, 지금은 존버 씨가 우리들의 고달픈 삶을 상징합니다. 존버해서 우리가 기다리던 고도를 만날 수만 있다면 좀 늦어지는 정도야 참겠는데, 이게 체제가 개인들에게 벌이는 거대한 사기극의 일부라면 우리는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를 넘어 과로사를 부추기는 기업과 정부라면, 뉴저지 소재 룻거스 대 교수 줄리 리빙스턴의 연구 결과(p37)를 읽고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저자 김관욱 교수는 영국 더럼에서 박사를 한 분이어서인지 책 곳곳에 영국의 사례가 인용됩니다. 당시 인도계 수낙 총리(지금은 선거에서 져서 노동당에 정권이 넘어갔습니다)가 NHS 재정 파탄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여러 조치들이, 기실은 시스템의 온갖 썩은 문제들을 미봉하기 위해 내세운 편법이며 그 폐해는 기층 민중이 그대로 뒤집어쓴다는 끔찍한 결론을 대중도 어렵지 않게 간파했습니다. 수낙은 그래서 실각했지만, 한국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를 지워버리면 좋은 본보기, 나를 지키면 나쁜 본보기(p74)"를 은근히, 아니 대놓고 강요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노동은 상처만 남기고, 하다못해 여성들이 꾸밈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마스크 착용 시기가 그리워졌다(p75)는 말이 나오는데,  이 와중에도 현장에서의 과로사, 사고사 뉴스는 그치지 않고 이어집니다(p99).

나치에 저항했던 백장미단 관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고전이 있었습니다. 2009년 한국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불상사를 추념하는 책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니왔었고, 지금 김관욱 박사의 이 책에서는 p99에서, 2022년에 출간된 <2136, 529>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 책의 부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입니다. 문구 사이에 찍힌 쉼표가 의미심장하게도 느껴지는데, 대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많은 제물을 제단에 더 바쳐야 올바른 공감과 각성이 확산되겠습니까. 벌렌트가 말한 감각중추의 마비가 언제쯤 원상으로 돌아오겠습니까.

p153을 보면, 정신과 의사 오카다 다카시는 <심리조작의 비밀>이란 책에서,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큰 규모의 재난을 일으켜 그간 누적된 사회 성원들의 조건반사가 한번에 리셋되는 효과를 노린다는, 이른바 집단세뇌 패턴을 분석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소련의 천재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의 성과에 기반한 논의인데 저자는 2022년 이후 이어진 자연재해로 인해 한국인이 겪는 트라우마의 도미노가 혹시 이와 관련된 건 아닌지 의혹을 제기합니다. "도덕이 초기화한 사회에서 냉소와 외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이 또 없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partial truth와 인포데믹의 병폐에 대해서도 저자는 p173 이하에서 논의합니다.

짧은 책이지만 다양한 르포, 고전, 학술논문, 문학작품 등이 향연을 이루듯 인용되며 독자에게 생각할 숙제를 던져 줍니다. 우리의 노동, 이웃의 노동이 과연 얼마나 올바르게 보상되는지 깊이 성찰해 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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