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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시대 - 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지음 / 타인의사유 / 2024년 12월
평점 :
서울대 학부 시절 명성이 지금까지도 후배들 사이에 자자한 임승휘 교수님이 쓴 중근세 유럽 분류사 주제 서적입니다. 대중서로 쉽게 쓰였지만 역사 마니아들도 종종 간과하는 좋은 포인트도 짚어 주셔서 여러 모로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선민의식이란 건 존재했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이 없어도 그 속한 집단에 대해 느끼는 긍지로 자존을 (어느 정도는)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는 때로 없는 사실까지 부풀리면서 단결을 자극하는 건데... 이 책 p18에 나오는 스페인 사람들의 레콩키스타 시대 선민의식이란, 그 근거가 없지 않았고 국운이 이 정도로 잘 풀리면 자부심, 국뽕(?)에 젖어들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민의식과 선민의식이 충돌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시기 이베리아 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극심한 반유대주의 운동은 그 부작용 때문에 나중에 결국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의 미래까지 암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한참 후 대영제국이 잘나갈 때 적어도 그들은 반유대주의로 제국의 엔진에서 스스로 김을 빼지는 않았습니다. 똘레랑스가 어느 상황에서나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설령 꼴보기 싫어도) 내 곁에 둬야 나한테 이로운 법입니다.
사람은 크게 될 사람일수록 자신의 협소한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바깥 세상을 두루 둘러봐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 유시민씨의 어느 책(초판)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는데, 애덤 스미스가 교수 시절 타운셴드 재무상(스미스와 같은 또래입니다)의 의붓아들(재혼 부인이 데려온, 죽은 전남편 소생 장남)의 가정교사 자격으로 그랜드 투어(이 책 p70)를 수행했을 때, 그 공작의 장남이 그 여행으로 얼마나 큰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애덤 스미스는 그 여행의 전과 후가 완전히 달랐다는 게 그 저자(유시민씨)의 평가였습니다.
그런데 스미스와 버클루 공작(스미스의 제자) 사이는 대략 20년 정도 나이 차가 나며, 버클루 공작은 나중에 제국의 존립을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제법 큰 역할을 합니다. 의붓아버지 타운셴드 본인은 자작 가문의 차남이며 따라서 부친의 작위도 세습하지 못했습니다(나무위키 같은 데서 타운젠드 공작이라고 나오는 건 명백한 오류입니다).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이 경제학의 시조이므로(저도 전공이 경제학입니다)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이야 그 누구라도 스미스의 업적에 감히 비길 바가 못 되겠으나, 적어도 18세기 말 당대에는 헨리 스코트, 즉 제3대 버클루 공작이 스미스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었겠습니다.
또 헨리 스코트가 어렸을 때 찰스 타운셴드가 선심이나 쓰듯 오버스펙 가정교사를 붙였다거나 현재 가치로 대개 17억원이 넘는(이 책 p80) 그랜드 투어를 시켜 준 게 아니고, 그 죽은 부친의 유산과 명예에 합당한 대우를 그 아들에게 법정대리인의 당연한 의무로서 행했을 뿐입니다. 타운셴드(Townshend)는 그 이름도 한국어로 자꾸 타운젠드로 잘못 표기되는데(예를 들면 한국어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같은 곳에서) 이건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참고로, 이 책에 찰스 타운셴드나 애덤 스미스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며 그랜드 투어 토픽이 나와서 제가 서평자로서 잠시 여담을 해 봤습니다. 제 서평을 읽어 온 분들은 이미 아는 분위기죠.
p97에 문장(紋章)에 대한 재미있고 정확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꼭 저자께서 유럽 귀족 가문의 문장(heraldry)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하고 기대했는데 정말로 있어서 독자로서 아주 만족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마니아들도 문장만 나오면 아주 환장을 하죠. 이 책은 문장들을 전부 천연색 도판으로 제시해 주는데다 권위자(즉 이 책 저자)의 적확한 설명까지 곁들여져 너무도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이런 책은 원래 이런 맛에 보는 것입니다.
p175 이하에는 1대 버킹엄 공작인 조지 빌리어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미칠 듯 재미있는 장편 <삼총사>를 보면 이양반이 캐릭터로도 등장하는데, 이야기의 재미를 몇 배로 늘려주는 게 바로 이 캐릭터의 기여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역사상의 실존인물이기도 한데, 왕비 등이 명백한 불륜(아동문학가 조풍연씨가 윤색을 한 버전이었는데도)을 대체 왜! 저지르는 건지 어렸을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뭐 제가 커서 펭귄 영문번역판(원본은 당연 불어입니다. 전 아직 못 읽어 봤습니다)으로 통독해도 특별한 건 없었고 결국 그의 잘생긴 외모와 쩔어주는 말빨이 비결이었다는 건데, 임승휘 교수님이 이 챕터에서 자신만의 솜씨로 재미있게 들려 주므로 적어도 이 파트만큼은 꼭 읽어들 보셨으면 합니다.